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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Aug 04. 2021

"배식시간, 그녀와의 눈인사 (1/2)"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그 사람과의 추억

연구소라는 환경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남자 직원들은 무표정에 무감각하고, 의복에도 신경을 잘 쓰지 않으며, 그리고 - 이는 과학적이지 않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런 경우가 많기에 - 혈액형이 A type 이더군요. 어느 한 대기업의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을 근무하며 알게 된 주관적인 통계입니다. 하지만 이 분들이 어떤 대상 (그것이 그들의 전공분야이건,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이건, 음악, 기타 다른 취미, 또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건 간에)에 열정을 쏱기 시작하면 그 끝 또는 결과물은 대부분의 경우 화려하고 놀랍더군요. 하지만 이런 숨은 열정을 개방된 환경에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부서 - 영업 또는 마케팅, 아니면 홍보 - 에서 볼 수 있는 '다소 지나쳐 보이는 개방적인 문화'는 거의 목격할 수 없는 곳이 연구소라는 곳으로 생각됩니다. 직업상 여러 회사의 연구소를 자주 방문하고 어떤 경우에는 단기 기간 동안 상주했던 경험 및 관찰을 토대로 한 사견입니다.


제가 꽤 긴 기간 동안 깊이 관여했던 어느 회사의 연구소도 그랬습니다. 어디를 가나 조용하고, 회의도 매우 차분하며, 심지어는 500명 이상이 한 번에 모이는 구내식당에서조차 소음이 거의 없습니다. 천정에 설치한 여러 대의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만 명확하게 들릴 뿐, 대부분의 직원들은 조용히 그리고 매우 빨리 식사를 마치고 난 후 건물 밖으로 거의 일렬로 나가서 삼삼오오 모여 일 이야기를 하거나 간단한 운동을 하는 그런 곳이었지요. 배식과정도 매우 질서 있어서, 각 메뉴별로 줄을 서서 있는 직원들을 맨 앞에서 보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잘 안 보일 정도로, 마치 교도소가 이런 환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일률적이며 단조롭습니다.


저는 이런 분위기가 조용하기 때문이라도 마음에 들었지만, 5대의 TV에서 흘러나오는 다소 높은 핏치의 규격화된 남녀 앵커들의 목소리는 거슬리더군요. 아예 끄던지 아니면 다른 프로그램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연구소 환경에 맞는 잔잔한 음악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사 교육을 담당하던 저였지만 이런 제안은 식당 운영 당사자 (삼성그룹 내 food service 계열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에게 문의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2007년 가을이었고, 창문 밖에는 나무마다 아주 예쁜 단풍이 들어 대부분의 직원들이 가을의 아름다움을 머리 위로 하 산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던 그날 점심시간이었지요. 다른 직원들보다 꽤 늦은 시간에 식사를 마친 후 구내식당 바로 옆에 있는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네, 들어오세요."


하며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구내식당을 관리하는 사무실 직원은 의례 나이들은 사람일 경우가 많고, 그것도 경험으로 볼 때 상냥하거나 친절하지 않은, 마치 보안실 직원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는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와는 달리 여성의 목소리는 매우 뜻밖이었지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느 여성이 일어서서 환하게 웃으며 제게 걸어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네... 식당 내 환경 관련하여... 제안을 드릴 수 있나... 해서요... "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더 쉽게 느껴지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 업무상 토론이건 길거리에서 맞닥트린 불쾌한 상대와의 말싸움이건 간에 - 제 의견이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적은 없을 정도로 '말의 기술'이 있다고 자부해오던 저였지만, 그날 그 사람 앞에서는 말이 자꾸 끊기더군요.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수려한 여성이었습니다. 한국적이며 안정적인 미모에 서구적인 멋을 갖춘 사람이었지요. 흰 가운을 입고 저를 향하여 다가오는 모에서 왠지 강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화장기가 거의 없던 청초한 얼굴이었을까요? 저를 향해 탄력 있는 발걸음으로 걸어온 후 단정하게 서서 약간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미소를 띠고 저를 바라보던 그 큰 눈동자였을까요? 아니면 "여성의 아름다움은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로 정의가 된다"며 "아름다움이란 '충격효과'이며 외모나 라인 (몸매) 보다는 제스처 (동작 및 자세)가 주는 충격적인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라는 말을 남긴 세계적인 디자이너 Yves Saint Laurant 가 말한 그 shock effect 였을까요?


이 여성은 영양사로 근무하는 김지수 씨였습니다. 그날 이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하고 그 방에서 나왔는지는 이 shock effect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music CD 몇 장을 만들어서 선물을 하고 싶고, 이 음악들을 직원들을 위해 점심시간 때 틀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부탁과 더불어, 정성껏 준비하여 주신 덕분에 날마다 음식을 아주 잘 먹고 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나온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대화 내내 저를 응시하던 그 아름다운 눈빛도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날 밤, 저는 Paul Mauriat Orchestra의 명곡들로 CD 3장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회사가 대주주인 회사라,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프랑스인들도 고려한 선택이었지요. "Song for Anna"란 노래도 당연히 넣었습니다. Paul Mauriat의 노래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열 살 때 처음 들은 후 지금까지도 꾸준히 듣는 노래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강 (river) 그리고 다리 (bridge)가 연상되었고, 2005년에 Manhattan과 Queens를 연결하는 59th Street Bridge 옆을 지나다니는 tram을 타고 찍은 영상에 이 노래를 더하여 아래 영상도 만들 만큼 이 노래에 대한 애착이 깊었지요. 하지만 김지수 씨에게 줄 CD에 이 노래를 수록한 후엔 이 노래를 들을 때 그녀와의 짧은 추억 또한 떠오르더군요.


"그녀를 만나기 100m 전"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저는 이 CD 세 장을 만든 후 그다음 날이 무척이나 기다려졌던 10월의 어느 가을밤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F_pX4CSH9o


-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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