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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Aug 05. 2021

"배식시간, 그녀와의 눈인사 (2/2)"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그 사람과의 추억

그다음 날, 점심시간이었습니다. CD 3장을 전달하기 위해 오전 시간에 지수 씨의 사무실에 찾아가기엔 제 자신에게도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라 점심까지 기다렸습니다. 여전히 같은 분위기의 구내식당은 400여 명의 직원들이 중식, 한식, 양식 코너에 줄을 질서 있게 서서 배식을 받고 있었지요. 지수 씨는 아마도 사무실에 있는지, 배식 윈도우 쪽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식 배식 줄에 서 있던 저는 배식 순서가 다가옴에 따라 키친의 안쪽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고, 안쪽 코너에서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제와 비슷한 옷차림에 바지 대신 치마를 입고 있던 그녀는 무언가를 열심히 직원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더군요. 바빠 보이기도 했지만 저와 사전에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단 하루 전 날 처음 본 사람에게 손을 흔들다거나 목소리를 내어 그녀를 부를 수도 없었기에, 일단은 배식을 받고 식사 후에 사무실에 가서 CD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배식 트레이를 직원으로부터 받고 테이블을 찾기 위해 돌아서자마자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OOO 선생님, 안녕하세요!"


돌아보니 지수 씨였지요. 어제 실수로 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가 제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고, 또한 그녀가 제 이름을 어떻게든 알고 있었기에 이 사람과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을 알고 계셔서 누구신가 했습니다."

"아, 죄송해요. 전부터 누구신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며 웃더군요. 가끔은 왼쪽으로 머리를 약간 기우는 습관이 있다는 말을 나중에 그녀로부터 들었는데, 이 때도 그랬습니다. 오른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것은 신뢰감을 의미한다던데, 왼쪽의 경우는 그 반대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깐 스쳐 지나가더군요. 어제 보았던 그녀의 머리는 오늘은 어떤 종류의 그물 같은 것에 들어가 있었지요 (음식에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그런 류). 이마에는 약간의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바쁜 점심 배식시간이라 여기저기 분주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 사람의 업무를 느낄 수 있는 외모였지요.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꽤 마른 체형의 여자였습니다. 남자들끼리 속되게 표현하는 -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있다고 하는 - 그런 체형의 여성이었지요.


"CD 가져오셨어요?"

"네, 여기 있습니다."


배식 트레이를 내려놓고 CD 3장을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와, 3장이나요? 신난다!"

"기회가 되면 CD1부터 들어보세요. 녹음을 하다 보니 1번에 가장 좋은 곡들이 들어갔더군요. 그래도 2번 그리고 3번도 아주 좋은 음악들이 많습니다."

"네, 너무 감사해요!"


하며 그녀는 제 손등에 그녀의 손을 살짝 올려놓으며 인사를 한 후 사무실로 빠른 발걸음으로 들어갔습니다. 아, 그때의 느낌이란! 아마 아래 영상에서 보실 수 있듯이, 제가 그날 이렇게 반응했을 듯 합니다 (사실 이랬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YNyYTthVbk


빈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만남도 무난했다는 생각에 만족을 하고 식사를 하던 중 TV 5대의 볼륨이 갑자기 꺼지더군요. 그래도 반응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놀라울 뿐이었지만, 원래 그곳은 그런 곳이었으니까요. "어제 뉴스 방송이 너무 시끄럽다는 말이 지금 기억이 나서 소리를 줄였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몇 초 후에 아주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Song for Anna" 였지요 - 지수 씨였습니다. 음악이 나온 후 조금 지나자  몇몇 직원들도 식사 속도를 줄이고 상반신을 들어 찬찬히 노래를 듣기 시작하더군요. 역시 음악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싫거나 좋거나 하루에 많게는 수십 차례 듣고 읽게 되는 뉴스 속에서 몸과 마음을 반강제적으로 삭여가기보다는 단 20분의 짧은 시간이나마 음악을 통해 이런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단순한 진실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왔다는 점 또한 이 슬프고도 달콤한 음악 속에서 느껴지더군요.


사무실에서 그녀가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 쪽을 보며 그녀는 눈으로 인사를 하더군요. 글로 어떻게 표현할 수는 없는, 진실이 담긴 인사였습니다. 그 가을, 지수 씨와는 다시 대면할 기회가 없었지만, 먼 거리에서도 저를 보게 될 때마다 그녀는 이 눈인사를 잊지 않고 보내주었고, 저는 짧지만 느린 목례로 그에 답했습니다 - 그녀의 습관처럽 약간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면서 맞인사를 하곤 했지요.


그날 이후, 제 CD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수 씨는 CD 3장을 순서대로 틀어주었지요. 추가로 몇 장 더 만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만 어떤 종류의 음악을 선택해야 할지가 고민거리가 되었지요.




그 11월이 지나고 12월, 겨울이 왔습니다. 이 적막한 연구소 여기저기에도 크리스마스 크리가 장식되어 세워졌지요. 눈도 그 해는 꽤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바로 다음날은 12월 31일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제외한다면 여긴 정말 적막한 곳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연말 분위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지요. 프랑스 사람들은 반면 나름대로 이 연말을 즐기고 있었고, 그들 중 한 명과 긴 점심을 끝내고 식사 후 (프랑스인들은 정말 말이 많더군요) 제 사무실로 가던 중 지수 씨가 저 멀리 구내식당 정문에 서서 제가 나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식당의 후문과 정문은 50m 정도 거리가 있어서 제가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녀도 만약 저를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었다면 후문 쪽에서 서서 있었어야 하지만, 그녀는 그리하지 않았지요.


다가간 그녀는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12월 31일로 계약이 마무리되어 처인구에 있는 신세계 연수원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제게 감사하다며 악수를 청했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작별 악수를 했습니다. 짧은 편지를 썼다고 하며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봉투를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지수입니다.


내일이면 떠나게 됩니다.


저도 이렇게 일찍 떠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잘 대해 주셨는데, 정말 아쉬움이 많습니다.


오늘 짐을 챙기면서 그동안 주셨던 음악 CD도 정리를 하였습니다.


제가 CD는 잘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좋은 곡도 많고....집에서도 듣고 있어요!


바쁘셨을 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뉴욕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 하였으나,


직장이라서 선뜻 사람들을 대하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제가...영어를 못해서, 창피하기도 하구요!


이해하시죠?   *^^*


항상 밝은 모습으로 대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몸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한 일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김지수 올림



너무나 짧은 인연이었기에 제겐 그녀에 대해 어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근거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커피를 같이 하자는 말도, 퇴근길에 데려다주겠다는 제안도, 그 무엇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던 일이 없더군요. 그저 미소로 저도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쉽지만 그렇게 끝나야 하는 인연이었지요. 그 대신 삼성 계열사에서 강연 요청이 와서 갈 때마다 그곳에서 일하는 영양사가 누구인지 꼭 찾아가 보는 습관이 생겼지요. 아직 그녀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결혼을 한 후 일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 모습도 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은 많은 것을 여자로부터 뺏어가더군요 - 외모도, 성격도, 그리고 심지어는 목소리도. 저는 아직 크게 변하지 않은 외모라 그녀가 알아보기엔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언젠가는 - 이란 생각으로 간간히 떠오르는 이 사람의 shock effect를 떠올리곤 합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 사람만큼 짧은 시간에 제게 그런 임팩트를 준 사람은 없으니까요.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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