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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Nov 30. 2021

서울, 1978

Non-fiction Series: #2


우리 가족이 이 동네로 이사를 온 때가 1978년 가을로 기억한다. 그전까지는 철산리라는 동네, 지금의 광명시에 위치했던 지금은 오래전에 사라진 후 개발된 터에 있었던 5층짜리 광복아파트라는 소형 아파트 단지 내 10동 5층에 살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토끼도 잡고, 아파트 단지 앞에 있던 논두렁에서 또아리를 감고 쉭쉭 소리를 내던 뱀도 본 기억이 있으며, 아파트 내 놀이터 주변에 무수히도 많이 피어있던 코스모스 꽃들도 기억한다.



그곳의 추억들 중 하나가 beacon tower라는 것이다. 공항 근처에 가면 아주 높지만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철제 구조물로 된 탑들이 많다. 이런 탑들을 beacon tower 또는 airport warning light 들이라 하는데, 대략 100m 높이는 되어 보이며, 매 20m 정도마다 밝은 빛을 내는 조명장치 (아마도 큰 전구)가 설치되어 간헐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깜박거리도록 되어 있다. 이 타워를 지탱하기 위해 세 방향으로 수많은 와이어가 서로 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 타워를 땅과 연결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고, 가까이 가면 약간의 전기적인 소음을 내며 24시간 내내 이렇게 작동을 하고 있지만 밤이 되어 자정이 되고 새벽이 되는 시간에 이 타워들을 보면 꽤 묘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그 높이 때문일까? 근대문명의, 산업화의, 첨단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함과 위압감, 그 반면에 이 거대함이 주는 외로움까지 5살의 어린 나이에도 느꼈던 듯하다.



지금도 가을 길 코스모스를 보면 그곳의 추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르지만, 이런 추억의 소품들 - 꽃, 놀이터, 토끼, 해바라기, 그리고 이 철제 탑까지 - 보다는 가을, 철산리, 철제탑, 그리고 광복아파트로 이어지는 추억 끝에는 아마도 우리 가족이 겪었던 가장 비극적인 일의 기억으로 반드시 이어진다.



그때를 역으로 헤아려보니 197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봄날 같은 날씨의 밤이었고,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아파트 5층 창문 바깥으로 아파트 앞쪽을 내려다보던 기억. 가로등 아래 아버지와 어느 여자가 서 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어머니는 마루에서 가만히 벽을 응시하고 앉아계셨고, 누나는 엄마 옆에서 같이 가만히 조용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날 밤의 기억은 이것으로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그다음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동대문 근처에 있었던 금용 호텔이라는 곳의 어느 방에서 누나와 함께 창 밖을 바라보던 기억이다. 창 밖으로는 지금은 아마도 사라지고 없는 서울운동장이라는 야구장이 있었고, 밤이었는데 야간경기가 열리고 있었는지 조명들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아버지와 그 낯선 여자가 그 호텔방을 자주 드나들었던 기억과, 엄마에게 가고 싶어서 누나와 함께 창문을 내다보며 울던 기억도 지금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 기억 이후 2년이 지난 1978년, 오랜 방황을 청산하고 다시 돌아온 아버지를 어머니가 다시 받아들인 곳이 이곳 장위동의 허름한 집이었다. 그 2년간 우리 집은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난 후였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동네였다. 어린 나이에도 그곳은 처절하게도 더러웠고 암울했으며, 아버지로 인해 생긴 그리고 아직 하나도 가시지 않은 슬픔과 분노의 흔적 또한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꿋꿋하게 다시 가족을 추스르고 심지어는 외도를 한 남편 또한 다시 집에 들이셨다. 신앙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그나마 남은 그에 대한 그나마 남은 사랑 때문이었을까? 8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어머니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리고 지난 40여 년간 이어진 남편의 외도와 방황, 일탈과 술과 도박을 신앙으로 극복하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지만, 어린 눈으로, 십 대의 눈으로 그리고 성인이 되어 바라본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할 때면 어머니의 희생이 목이 메일 정도로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은 곳이 칼에 찔리듯이 아파온다.



78년 겨울은 따스하고도 유달리 추웠던 계절이었다. 다시 시작한 삶이지만 아머지는 아직도 밤늦은 시간, 때로는 새벽시간에 집에 들어오시던 아버지를 어머니의 말씀을 듣자면 내가 저 창문을 통해 골목길을 내다보며 마냥 기다렸다고 한다. 아직 6살이라 책들과 박스를 쌓아서 올라선 후, 뿌연 창문의 투명한 한 구석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기억 또한 내게 남아있다. 골목을 비치던 전봇대 등도 왜 그렇게 외롭고 슬프게 느껴졌는지, 2년 전 광복아파트에서 창문을 통해 올려다보던 beacon tower를 보던 기억도 머릿속에 교차했던 그 해 겨울의 한 추억이 매해 겨울이면 지금도 떠오른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데 우리 가족만 외롭게 떨어져나간 듯한 기 해 겨울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즐거운 추억 또한 많은 겨울이었기도 하다.


-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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