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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Nov 07. 2023

바람 살짝?

지나가는 생각들



"일단 카드 환불진행하신 후

900원 빼고 9100원 결제해야 해여."

"네, 그렇게 하세요."

"900원이네요 호호."

"그러게요, 하하."

"아까 결제하신 카드 주세여."

"네."


편의점에서나 또는 돈계산을 하는 창구와 같은 곳에서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지 않은 적이 오래됩니다. 예전처럼 인간미가 배어있는 눈빛을 볼 수 없는지도 오래고, 저 또한 이런 선입견으로 상대를 바라볼 것임이 뻔하기에 그다지 따스한 눈빛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대략 그 상대의 주변 두 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주고받기를 합니다.


오늘 오전에는 OO성모병원에 정기검진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대부분 kiosk에서 위와 같은 일을 처리하는데, 자꾸 오류가 나더군요. 그래서 고객서비스 창구로 가서 옆에 있는 번호표를 한 장 뽑고 제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061번... 박찬호 선수 등번호네... 진정한 Big Leaguer였지. 그 후엔 아마도 추신수 선수. 그 외 한국에서 미국 MLB로 간 선수들은 모두 piker 들뿐이야."


이런 생각도 하며 순서를 기다렸고, 제 번호가 곧 전광판에 올라왔습니다. "안녕하세여"라고 인사를 하는, 목소리의 clarity와 tone을 들으니 20대 여성이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이후 대화에서 "여"와 "요"를 번갈아 규칙없이 썼습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아, 네, kiosk에서

처방전만 받으려고 하는데

환불대상이라 카운터로 가라네요."

"아, 네, 그게 그래요. 제가 해드릴게여."


특이하게 밝고 끌리는 목소리였기에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꽤 예쁘더군요. 제 눈에 콩깍지라고, 고혹적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병원 유니폼보다는 Italian dress suit 이 더 어울릴 듯한 외모였습니다.


"일단 카드 환불진행하신 후

900원 빼고 9100원 결제해야 해여."

"네, 그렇게 하세요."

"900원이네요 호호."

"그러게요, 하하."

"아까 결제하신 카드 주세여."

"네."


고객응대를 하면서 구체적인 금액을 지칭하여 웃는 경우는 본 적이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 CS에서는 하지 않아야 할 행위겠지만, 이 여성의 경우는 전혀 불쾌하지 않더군요. 이 또한 제 눈에 콩깍지였겠지요.


"900원이면 아이스크림 하나네요."

"...."


이 여성은 잠시 고개를 들어 제 얼굴을 바라보고, 약간 Renée Zellweger의 pouting lips와 같이 입술을 모으고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요즘엔 아이스크림도 1000원 넘어요..."

"하하 그렇네요. 그럼 껌이나 사야겠어요."


세상에. 그래도 뉴욕에서 중고등교육을 받고, 대학교도 다녔고, 회사에서 지원하는 소셜문화교육 (댄스, 대화, 게임 등 교육)까지 받은 내가, 그리고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꽤 멋진 여성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20대와 30대를 살아온 내가, 50대로 들어서는 지금 더 중후하고 고상한 방식의 대화로 끌고 가야 하는데, 고작 껌 이야기로 아름다운 여성과 대화를 하고 있다니! 참 한심했습니다. 예전 그 smooth talk 들은 다 어디 가고, 머릿속엔 "메로나 이야기를 했어야 하나?"까지 스쳐 지나갈 정도로 스타일이 망가졌다니!!!


그래도 이 아가씨는 즐거운 듯 보였으니...


"그럼 되겠네여! ~ "

"하하."

"또 뵈어요!"

"네. 수고!"


이렇게 말하며 저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마치 군인이 경례를 하듯이, 하지만 그 딱딱한 경례가 아닌 듯 그 끝을 손가락으로 하늘에 무언가를 흩날려버리는 듯이 그녀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본 그녀의 활짝 웃는 그 미소와 그 눈빛, 오래 잊히지 않을 듯합니다.


바람 살짝 들었던 것일까요?


결혼한 적도 없고 동거를 한 사람도 없으니, 아직 연애는 legal이지만, 제 나이의 반이 조금 넘었을 듯한 여성과의 대화는 녹색 가득한 들판에서 맞는 단비처럼 생기로운 경험이었습니다.


- November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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