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mi Jul 08. 2021

"나의 학생, 그리고 나의 한 사랑 (2)"

"가보지 못한 Nyack 의 추억들"에 딸린 소소한 기억들

지혜를 처음 본 때가 1992년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들어가서 첫 해를 지낸 후 맞게 된 여름방학 때였지요. 저는 그때 20살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에게 가장 매력 있었던 여름 직장이 job 이 summer school에서 가르치는 일이었고, 1990년대 뉴욕에서는 - 최소한 재미교포 20대 대학생들에게는 - 가장 수입이 좋은 직종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회사에서 인턴 또는 계약직을 하더라도 2달 남짓한 기간 동안 용돈을 충분히 벌 수 없었지만, summer school에서 일을 하게 되면 8주간 3,000 불을 벌 수 있었던 일이었고, 상당히 재미도 있었습니다. 사립 아카데미, 고등학교, 그리고 교회에서 이런 일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었지요. 저는 그중 뉴욕 Queens 에 위치한 비교적 큰 장로교회를 선택하여 지원했고, 다행히도 합격하여 junior high school 9학년 반을 담당했는데, 이때 지혜가 제 반에 속해 있었습니다. 지혜는 그때 15살이었고, 이 장로교회에 태어나면서부터 다니고 있었고, 한국어도 잘 하지만 완전한 2세였습니다. 긴 머리에 보통 체격, 그리고 언행 모두 상당히 평범한 아이였지만, 뉴욕에 있던 4개의 사립고등학교들 중 하나에 입학했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그때 그 교회와의 관계를 시작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그 후 2년간을 주일학교에서 고등부 한 반을 담당했었습니다. 물론 지혜도 계속 제 반에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 사이에서 그녀에겐 저는 언제나 주일학교 선생님이란 전제가 있어왔지만, 중간에 이런 관계가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나이 차이가 그 이유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 고작 5살 차이였기 때문에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관계의 설정이 우리가 동시에 20대였을 때 참 애매했고, 제가 30대였고 그녀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그랬으며, 또한 우리가 30대에 각자가 미혼으로 지내고 있었을 때 또한 그랬습니다. 다시 1992년의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미국 뉴욕의 교포사회에서는 1세와 2 세간의 연결고리가 없어져가는 시기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이런 현상이 있었는데, 미국에 가게 되면 90% 이상이 다니게 된다는 교회에서도 같았습니다. 당시 2세 중고등학생 교포 아이들을 영어와 또한 문화적 교감을 가지고 가르칠 1세들이 없으셨기에, 저와 같은 사람이 적격이었을 듯합니다 – 교포 2세들이 이 아이들을 가르치자니 1세들의 신앙을 제대로 전달할지도 의문이었고, 그렇다고 1세들이 하자니 재미도 없고 언어가 안 되니까요. 이렇게 하여 처음 담당한 반이 high school 반. 사실, 학생들 모두와 제 나이 차이가 5살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참 난감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지혜는 매우 열심히 배우고 따랐습니다. 가르치느라 힘들어하는 제게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지까지 써서 주었던 착한 마음씨도 기억이 자주 납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여러 면에서 그녀가 힘들었을 때, 제가 가능한 선에서는 자발적으로 또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필요하다고 할 때엔 꼭 살펴주었습니다.     


지혜는 참 예쁜 아이였습니다. 대학생이 된 후 그녀의 지적인 매력만큼이나 외적인 매력도 남다르게 뛰어났었지요. 당시 한국에서 유명했던 미니시리즈 “질투”에 출연했던 배우 김혜리 씨와 지혜의 외모가 상당히 비슷했다는 말들을 할 정도로, 멋진 아이였습니다. 우리 사이가 선생님/학생의 관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우린 간혹 그 관계의 바깥 테두리에서 있던 적도 있었지요. 그 애와의 첫 이성의 감정은… 그녀가 20살이었던 대학 졸업반이었던 1997년 겨울, Pennsylvania 에 있는 Pocono Retreat Center 에 당시 중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다녀오는 길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녀는 1박 2일의 주말을 통한 일정을 저를 도와주겠다고 같이 와 주었고, 돌아오는 길엔 제가 운전을 하고 있던 5대의 Dodge van 들 중 제가 한 대에 동석하여 조수석에서 제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뒤에는 중학교 남학생/여학생 아이들이 피곤해서 잠에 빠져 있었지만, Agnes는 조수석에서 계속 저와 대화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당시 유명했던 CCM 가수 Steven Curtis Chapman 의 "I will be there"라는 노래를 그 애가 참 좋아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었고, 가사 일부가 이렇게 흘러가는 노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qD7aq-7PWc


I will be here

And you can cry on my shoulder
When the mirror tells us we're older
I will hold you
And I will be here
To watch you grow in beauty
And tell you all the things you are to me
I will be here.


그때 Agnes 가 제 오른쪽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제게 해 준 말이 기억납니다:     


"오빠가 나중에까지 이렇게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어를 잘 하지만 저와의 대화 중 한국어를 쓰는 적이 거의 없던 지혜였지만, 중요한 말을 할 땐 꼭 한국어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 날도 그랬고, 저는 그녀의 이런 부탁에 흔쾌히 그러리라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 계속

작가의 이전글 "나의 학생, 그리고 나의 한 사랑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