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mi Dec 14. 2023

향기의 잔상

지나가는 생각들



1969년생의 비교적 젊은 작가인 Alain de Botton 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의 추억은 사진에 남아있기보다는 어떤 비스킷을 먹을 때, 하루의 어느 특정한 빛의 결, 향기, 또는 카펫의 느낌에 담겨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association by scent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어로는 마땅한 표현이 없거나 혹은 제 한국어 지식이 얕은 관계로 '향기의 잔상'이라고 해 보았습니다. '향기의 연계성' 또는 '향기와 연관성'이라고 하기엔 무참할 정도로 건조한 느낌이라 쓰지는 않겠습니다.


추억의 향기가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매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기억에 남아 영상으로 남아있는 향기 또는 냄새를 기억해 봅니다. 안내양이 있던 시절 버스의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매캐한 디젤버스 배출가스 냄새, 가족의 삶이 갑자기 변해 살던 집을 떠나 도봉구 변두리 어느 곳으로 내던져지듯이 살게 된 집에서 처음 맡아본 연탄가스 냄새와 집 옆을 흐르던 개천의 악취로 시작되는군요. 이후 그 해 겨울 집 앞을 리어카를 끌며 천천히 지나가던 군고구마 아저씨가 팔던 군고구마 껍질이 타는 구수한 냄새도 떠오릅니다. 월셋집 처마 아래 고드름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이 이런 냄새들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의 잔상입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향기와 냄새도 있습니다. 양혜연이라는 여자아이를 짝사랑하다 우연히 맡게 된 그 아이의 손수건 향기, 5학년 때 한국에서 처음 시작된 급식제도와 더불어 처음 맡게 된 양송이 수프의 향이 떠오릅니다. 물론 저는 급식을 신청할 수 있는 여유가 없던 집 아이라 이런저런 이유로 도시락을 싸 온 대략 10명의 반 친구들에게는 그저 애써 무시했지만 시선을 둘 수밖에 없던 향기의 유혹이었지요.


늦은 겨울밤 아버지를 마중 나가서 기다리던 버스정류장 옆에서 맡은 오징어구이 냄새도 뚜렷이 기억합니다. 건강이나 위생은 생각하지 않았던 당시라 그저 연탄이나 곤로 위에 놓고 바싹 태운 오징어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그 맛난 냄새는 가뜩이나 배가 고픈 제 배를 더 괴롭게 하곤 했지요. 늦은 버스에서 내린 아버지가 혹시 오징어를 사 주지 않으시려나 해도 매번 희망이었던 그 겨울밤 풍경들도 떠오릅니다.


뉴욕에 첫 발을 딛고 난 후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 맡게 된 향수의 향들을 기억합니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여성들은 향수를 매우 선호하는데, 특히 body odor 가 있어서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향으로 자신을 알리는 문화가 확실히 있습니다. 옅은 향보다는 강한 것으로 보통 뿌리지요. 학교 선생님들은 물론 옆자리에 앉은 히스패닉계 또는 백인 여자아이들도 다양한 향수와 화장품으로 치장하는 사회라, 그때까지도 한국에서는 전혀 맡아보지 못했던 향수의 냄새가 아직도 강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푸근한 노년의 할머니들이 뿌리는 향수와 맨해튼의 젊은 여성들이 뿌리는 향수의 차이, 그리고 그 향수들의 이름들을 꽤 많이 지금도 기억하지요. Scent of a Woman의 Colonel Slade처럼 많은 여성들과의 잠자리를 통해 알게 된 향수향이 아닌, 스쳐 지나가는 동안, 마주 보고 대화하는 동안 알게 된 향기들입니다.


맨해튼의 냄새들도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도시의 특별한 향은 없습니다. Deli grocery 가게 앞 진열되어 있는 수십 가지의 꽃향기는 맨해튼만의 것은 아닌 다른 미국 도시들도 그렇겠지만 특이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여러 맨홀에서 강하게 뿜어 나오는 증기의 냄새도 기억합니다. 땅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 오수냄새일 듯 하지만 그것도 아닌, 그저 물을 끓이면 나는 그런 냄새지요. 하지만 이 또한 - 맨해튼이 대서양과 맞닿아있는 곳이라 - 코 끝을 아주 잠깐 스치고는 사라집니다. 지하철 냄새도 있지요. 철로와 지하의 그런 공간이 섞여 만들어낸 metallic smell이라고 할까요? 청각과 시각, 그리고 후각을 아주 예민하게 만드는 특이한 공간이 뉴욕 지하철입니다.


십수 년이 지나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맡게 된 냄새 또한 기억합니다. 먼지냄새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지만 인천 공항에서 나와서 택시를 탈 때 맡은 그 냄새와 초저녁 소공동 롯데호텔에 내려서 제 콧속에 스며든 그 냄새는 비슷했습니다.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예전 어릴 적에도 맡은 냄새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고, 아마도 서울이란 도시의 특색 있는 그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지요.


이후로는 몇 명의 여성에 의한 향기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Chanel No.5를 좋아하던 그 사람의 향기, 대전이라는 중간지점에서 만난 저보다 16살이 어렸던 그 기상캐스터 여성의 옅은 freesia 향기가 기억납니다. 아마도 이 향기가 제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 가장 최근의 향기가 되겠군요.


소설가 이문열 님의 "젊은 날의 초상"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요즈음도 나는 열린 창가에서 회색으로 낮게 드리운 도회의 하늘을 바라보면 까닭 없이 마음 설레는 수가 있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런 오월의 창가에서였다."


정지된 사진보다는, 후각으로 느껴지는 추억 또는 이렇게 우연히 무언가를 보게 되면서 떠오르는 추억이 있습니다.


꽤 강렬하지요.


다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 December 14, 2023

작가의 이전글 분천 마을에 겨울이 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