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줄 달고 미국 여행
미국 도착 13일째 되는 날, 우리 부부는 ‘기가 막히게 멋진’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미국 생활이 열흘을 넘어가자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고 조르는 남편에게 죽기 전에 그랜드 캐년을 보고 가자고 설득해 겨우 도착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이틀을 지내다 미서부의 <그랜드 서클 투어>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라스베이거스는 우리 부부끼리 떠나는 여행이어서 우리도 긴장이 되었지만, 자식들도 걱정이 많은듯했다. 집을 떠나기 전날, 아들은 우버택시 타는 법을 우리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실제 라스베이거스 공항에 내리자 젊은이들이 우르르 우버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우리도 그곳까지는 갔으나 우버 택시를 타는데 실패하고 결국 택시를 탔다. 그까짓 게 뭐가 어렵냐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전화기는 한국에서 로밍해 간 한국 번호여서 잘 안된 것 같다고 변명해 본다. 우버 택시를 타보려고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같은 나이 든 사람들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만을 절감했다. 그 외에도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주문할 때 웬 선택지가 그렇게나 많은지 진땀 흘려야 하는 순간들이 줄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는 염려와는 달리 바가지요금을 씌우지도 않았고 엉뚱한 길로 우리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면 누구나 환영 입간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남편과 나도 라스베이거스 입성 기념으로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각 국가나 도시마다 자신의 특성을 압축하여 브랜딩을 만든다. 예를 들면 태국은 Amazing Thailand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서울은 I.Seoul.You를, 다낭은 Fantastic City라고 브랜딩 한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의 브랜딩은 ‘Fabulous LAS VEGAS’였다. Fabulous란 ‘기가 막히게 멋진’이라는 뜻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스스로를 기막히게 멋진 도시로 내세우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리고하면 예전에 본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알코올중독자 벤(니콜라스 케이지 분)과 거리의 여인 세라(엘리자베스 슈 분)가 만나 슬픈 사랑을 나눈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라스베이거스였다. 목에 검은 리본 목걸이를 하고 비정한 거리에 나서던 세라의 모습이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라스베이거스에 대한 선입견은 ‘기가 막히게 멋진’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환락 속에 병들어 가는 인생의 암울한 장소 같은 곳이었다.
딸이 우리를 위해 예약해 둔 호텔은 메인 스트립의 중심에 있는 벨라지오 호텔이었다. 벨라지오 호텔은 MGM 리조트 인터내셔널이 운영하고 있는 호텔로서 객실 수만 3천 개나 되는 세계 4대 호텔 중 하나라고 했다. 라스베이거스라고 하면 세계 유수의 거대호텔들이 다 모여있고 규모도 엄청나며 볼거리도 풍부한데 비하여 호텔료는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라스베이거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호텔비가 상당히 비쌌다.
나중에 짐을 풀고 나가보니 라스베이거스의 메인 스트립에는 세계적인 기념물들을 표방하는 호텔들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패리스 호텔에는 에펠탑이 높이 솟아있고, 그 건너편에는 로마를 재현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조금 걸어가면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표방한 베네시안 호텔이 있었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는 뉴욕뉴욕 호텔도 뺄 수 없는 사례라 하겠다.
벨라지오 호텔은 이탈리아의 벨라지오에 있는 코모 호수 휴양 시설을 모티브로 지어졌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호텔 앞에 거대한 인공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호텔에 들어서자 천정에 장식되어 있는 유리로 만든 수천 송이의 꽃이 호사스러움을 더했다.
나는 이상한 나라에 발을 디딘 엘리스가 된듯한 느낌이었다.
그 엘리스 앞으로 즐비한 슬롯머신의 행렬들이 나타나고 그 슬롯머신 앞에 빈틈없이 사람들이 앉아 기괴한 소리를 내는 기계와 씨름하는 모습들이 이어졌다. 기묘한 모습이었다.
라스베이거스 거리 구경에 나섰다. 마침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가 힘차게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수쇼를 구경하느라고 벨라지오 호텔 앞으로 몰려왔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들은 저마다 손님의 이목을 집중시킬 구경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벨라지오의 무기는 호텔 앞의 넓은 호수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야외 분수 쇼인 것 같았다. 우리도 가던 길을 멈추고 음악에 맞춰 수천 개의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으며 추는 춤을 지켜보았다.
낮에는 흰 물줄기의 춤이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는데, 밤이 되어 화려한 조명과 함께 물줄기가 춤을 추자 이곳이 왜 세계 3대 분수쇼로 유명세를 타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분수 쇼뿐만 아니라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니 눈아래에 풀장이 여러 개 달린 벨라지오 리조트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도 푸른 물이 넘치게 채워져 있었다.
라스베이거스는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리조트이다. 이 리조트를 찾아 전 세계에서 한해 4천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한다. 대단한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네바다의 사막 한가운데에 누가 이토록 풍부한 물을 공급하였을까?
라스베이거스가 성공한 첫 번째 요인은 네바다주가 도박을 허가한 때문일 것이다. 1931년 이곳에 처음으로 카지노가 합법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향락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인은 미국이 경제공황 탈출을 위해 인근에 후버댐을 건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후버댐에서 만든 전력을 공급하고 이곳에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들이면서 사막 한가운데에서 엄청난 물을 사용할 수 있는 소비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부터 카지노와 호텔들이 들어섰고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나 스티브 윈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라스베이거스를 테마를 가진 엔터테인먼트의 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뭐라고 해도 라스베이거스를 이토록 풍요롭게 만든 일등공신은 후버댐에서 오는 전력과 콜로라도 강물일 것이다.
잠시 분수 쇼를 구경하다가 길 건너 플라넷 호텔 쪽으로 건너갔다. 플라넷 호텔에서 바라보니 벨라지오의 위용이 더 잘 느껴졌다. 벨라지오뿐만이 아니었다. 길 건너편에는 로마를 재현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 플라넷 호텔 옆으로는 에펠탑이 세워진 패리스 호텔도 규모가 엄청났다. 저녁에 찾아간 베네시안 호텔은 객실 규모가 5천 실이나 되는 자이언트 호텔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거리를 흐르는 인파를 구경하기 위하여 에펠탑이 있는 거리 카페에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세계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지나갔다. 피부색이 제각각인 사람들, 키가 큰 사람들과 작은 사람들, 늘씬한 사람들과 뚱뚱한 사람들이 제각기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 보였다. 다양한 옷차람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멋을 뽐내는 모양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워 보였다.
거의 속옷차림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늘씬한 젊은 여성들이 이목을 집중받으며 지나가자 이번에는 웃통을 벗고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젊은 남자들이 등장하였다. 일단의 젊은 여성들이 최소한의 옷을 입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스루의 패션으로 지나갔다. 한마디로 거리에는 자유분방, 방종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흐르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있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려져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였더니 사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나는 그것이 마리화나 냄새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냥 알 수 있었다. 마리화나 냄새는 거리에서 뿐만 아니라 호텔로비에도 가득하여 이 냄새가 호텔방에까지 따라올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밤이 되자 더욱 뜨거워진 라스베이거스의 열기가 느껴졌다. 남편과 나는 다시 거리 구경에 나섰다. 낮보다 더 많은 인파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우리도 인파에 휩쓸리며 시저스 팰리스 호텔을 지나고 플라밍고 호텔의 화려한 조명을 지나 거대한 규모의 베네시안 호텔로 갔다. 베네시안 호텔에는 수로까지 만들어 곤돌라를 타고 진짜 베네치아에 온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곳을 휘감은 물도 콜로라도의 강물일 터였다.
우리는 수로의 계단에 앉아 곤돌라 선원이 부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는 모든 것이 가짜다. 엄청난 규모의 가짜다.
가짜 베네치아, 가짜 로마, 가짜 파리, 가짜 뉴욕....
인류가 몇 천년을 공 들여 이룩한 도시들이 이곳에선 한낮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마치 인류가 공들여 세운 문명을 현재의 금권으로 모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너무 진지한가).
이튿날에는 딸이 티켓팅해 준 오쇼(O show) 공연을 보았다. 물을 테마로 하는 공연이었다. 배우들이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펼치는 연기가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것 같았다. 태양의 서커스가 하던 종래의 서커스와는 품격이 다른, 팬터마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매일 밤 오쇼공연이 있다고 했는데 극장 안은 성장한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오쇼 공연뿐만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매일 어디에선가 쇼가 펼쳐지고 있다고 했다. 일전에 보았던 <엘비스>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흥행업자에게 붙들여 결코 라스베이거스 쇼장을 벋어날 수 없었다. 어디에선가 여전히 비정한 사연을 품고 쇼는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스베이거스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킨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인간 마음속에 내재된 온갖 갈망을 실현시켜 주는 곳이다. 그 갈망을 상업적으로 충족시켜 주고 기쁘게 돈을 뺏어가는 곳이 이곳이다. 사람들은 화려한 불빛과 거대한 호텔들과 카지노 사이에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성적 에너지를 불태운다. 자본주의의 끝판이 이곳이다. 미국은 아무런 혐오감 없이 이런 곳을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대놓고 인간 갈망을 부추기는 곳이 지구상에 라스베이거스 외에 또 있을까. 사막 한가운데에 이런 곳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미국의 거대한 자본주의에 소름이 돋았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내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도시라고 들었다. 한탕을 노리고 이곳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가진 것을 모두 날리고 자살하거나 지하 하수도에서 개미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벨라지오의 분수와 오쇼 공연장과 베네시안의 수로를 넘치게 채워주며 인간 욕망을 자극하던 물이 결국 지하 하수도로 흘러가고 있고, 거기에 라스베이거스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개미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거대한 비극처럼 여겨졌다. <라스베이거스를 못 떠나며>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는 것보다 더한 비극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결혼과 이혼도 초 간단히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너무 쉽다.
인간의 욕망을 철저히 쫓아가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범죄? 절망? 자살?
결코 해피 엔딩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