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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Mar 27. 2024

10. 반가워요, 캘리포니아 버즘나무

뱃줄 달고 미국 여행

 

마운틴 뷰 시청 쪽으로 가는 길의 초입에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즐비하게 서 있다고 해도 우리나라처럼 모든 가로수의 수종을 하나로 통일하여 압도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이 거리에 플라타너스를 심었다면 저쪽 거리에는 미국풍나무나 태산목 나무를 심는 등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곳 가로수의 특징인 듯했다.      


마운틴 뷰 시청 앞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플라타너스는 키가 크고 잎이 넓어(플라타너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넓다'라는 의미의 platys에서 유래하였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므로 가로수로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수종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가로수의 태반도 이 플라타너스이다.

그렇게 흔한 나무인데 내가 마운틴 뷰 거리에서 만난 플라타너스에 대해 주목하게 된 이유는 이 플라타너스가 한국에서는 좀체 보기 어려운 나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플라타너스를 ‘버즘나무’라고 부른다. 이 나무줄기의 겉껍질이 조각조각 떨어지고 나면 나무줄기에 예비군 군복 같은 얼룩얼룩한 문양이 생기는데 이것이 꼭 얼굴에 핀 버짐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얼굴에 버짐이 핀다’라고 하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 어릴 때는 얼굴에 버짐(백선)이 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버짐이 피면 얼굴피부가 플라타너스 줄기처럼 얼룩덜룩하게 보였다. 영양실조가 얼굴 버짐의 주요 원인이었는데, 요즈음은 영양이 좋아져 버짐이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나는 나무 중에서도 플라타너스를 특히 사랑한다. 늘씬한 키에다가 무성한 넓은 잎으로 무장한 모습이 가로수로 최적이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이 나무는 도심의 공해를 묵묵히 이겨낸다. 경쟁심도 어느 나무 못지않게 왕성하여 키 큰 나무들이 섞여 있는 숲에서도 키 경쟁에 절대 지지 않는다. 나는 그 기개도 좋아한다. 게다가 플라타너스 잎들은 매우 예쁘다. 자세히 보면 어느 잎 하나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없다. 제각기 개성을 살린 잎을 만들어 내는 멋쟁이 나무가 플라타너스이다.

이처럼 멋진 나무를 우리말로 하필 ‘버즘나무’라고 옮긴 데 대해서 나로서는 불만이다.

하지만 내가 불만을 가지거나 말거나 플라타너스는 우리나라에서 버즘나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의 플라타너스의 숙명이다. 너무 잘 자란다고 마구 가지치기를 당하여 닭발처럼 늘어서있는 것 또한 우리 땅에서의 이 나무의 숙명이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버즘나무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가 서남아시아나 남유럽이 원산인 버즘나무(Oriental Plane, Platanus orientalis)이고, 다른 하나는 북미원산인 양버즘나무(American Sycamore, Platanus occidentalis)이며, 이 두 종의 교배종인 단풍 버즘나무(London Plane or European Plane, Platanus X hispanica)가 나머지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버즘나무라고 부르지만 유럽에서는 Plane tree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Sycamore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양버즘나무가 아닌 버즘나무를 인식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방문 이틀째, 식구들과 홀마트 마켓을 갔을 때였다. 시차 때문인지 여행의 피곤 때문인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차가 멈추는 기척에 눈을 뜨자 바로 차창 앞에 플라타너스 나무가 보였다. 그런데 플라타너스의 한 열매줄기에 여러 개의 열매가 달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무엇인가?

분명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밀도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마켓 안으로 들어가 그날 밤에 먹을 와인을 고르느라고 분주했지만 나는 나무를 쳐다보고 나무 주변을 맴도느라고 분주했다.

저것은 단풍 버즘나무인가? 아니면 oriental 버즘나무인가? 분명 양버즘나무는 아니었다.


그런데 열매가 여러 개 달린 이 버즘나무를 마운틴 뷰 시청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오래 나무를 쳐다보았다. 앞에 가고 있던 남편이 나를 재촉하였다.  

     

마운틴 뷰 거리에서 만난 플라타너스


그 후로도 다운타운으로 나가거나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나무를 쳐다보며 마치 처음으로 이 나무를 발견한 듯 사진을 찍었다. 남편은 보다 못해

“맨날 같은 나무를 뭐 하러 그렇게 찍어대?”

하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새로운 버즘나무를 발견한 나의 기쁨을 모를 것이다.   


나는 사실 양버즘나무가 아닌 버즘나무를 미국에 와서 처음 보았다. 우리나라에도 양버즘나무와 버즘나무, 단풍 버즘나무가 도입되어 있다는 기록들은 보았지만 실제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은 양버즘나무들이었다. 어쩌다 간혹 단풍 버즘나무처럼 보이는 나무를 발견할 때도 있었지만 열매가 너무 아스라이 달려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

양재천을 걸을 때 목을 빼고 플라타너스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중늙은이가 보이면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만큼 나는 양버즘나무가 아닌  다른 버즘나무를 볼 기회를 앙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나무들을 구분하는 주요 방법이 열매자루에 달린 열매의 개수이다. 자료에 따르면 양버즘나무의 경우 대개 열매가 한 개씩 달리고 단풍 버즘나무의 경우 한 열매자루에 2개의 열매가 달리며 버즘나무에는 열매가 3개 이상 달린다고 한다.


잎이 떨어진 겨울에 플라타너스의 열매를 관측하기 쉬우므로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만날 때마다 목을 빼고 나무를 올려다본다.


우리나라의 양버즘나무 열매


그런데 마운틴 뷰의 길거리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열매가 너무 많이 달려있다. 이건 단풍 버즘나무나 버즘나무 수준을 넘어서는 밀도였다.

  

열매가 많이 달린 버즘나무


나는 이렇게 열매가 많이 달린 플라타너스 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플라타너스 나무가 캘리포니아 고유종인 California Sycamore (P. Racemosa)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양버즘나무라고 부르는 American Sycamore가 주로 미국 동부지역에 서식한다면 캘리포니아 버즘나무는 미서부,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 자생하는 나무라는 것이다.

 

미국 내 American Sycamore(좌)와 California Sycamore(우)의 서식지



그런데 마운틴 뷰 역 근처에 심어진 가로수에는 American Sycamore와 California Sycamore가 섞여있었다. 


마운틴 뷰 역 근처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American Sycamore와 California Sycamore가 섞여있다.


마운틴 뷰 역 근처 가로수:방울이 하나 달려있다. 


California Sycamore: 여러개의 암꽃이 달려있다. 


American Sycamore와 California Sycamore가 나란히 한 곳에 서식한다면 두 나무의 hybride가 탄생하는 것이 시간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California Sycamore와 가장 유사한 플라타너스 나무는 우리가 단풍 버즘나무라고 부르는 London Plane이라고 한다. London Plane은 Oriental Plane과 American Sycamore의 교잡종으로 태어났다. 이 교잡종은 1636년 영국의 식물학자인 John Tradescant가  American Sycamore를 영국으로 가져가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London Plane은 1700년대가 되자 나타났다고 하는데, '잡종 강세'의 특성을 나타내어 위풍당당한 모습에다 그 유명한 런던 스모그에서도 잘 견뎌 현재 영국 런던 가로수의 90%가 단풍 버즘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이 거행되면서 TV에서 장례식 장면이 생중계되었다. 나는 여왕의 운구가 버킹엄궁을 나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웰링턴 아치가 있는 하이드파크를 지나 윈저성으로 향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내 눈은 여왕의 운구행렬보다  그 운구행렬이 지나는 가로에 늘어서 있는 멋진 가로수들에 사로잡혀있었다. 단풍 버즘나무는 여전히 런던의 가로를 지켜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모습: 압도적인 가로수가 단풍 버즘나무이다.


American Sycamore와 California Sycamore도 hybride를 만들까?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직 그런 교잡종에 대한 보고가 없으니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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