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아 내가 왔다.
산청에 나의 작은 꽃밭이 있다.
서울과 산청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급적 자주 시골에 내려가 나의 꽃밭을 건사하려고 애를 쓴다.
이 꽃밭은 처음에는 시골집에 홀로 계신 시숙을 위해 만들었다.
시숙은 시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시고, 아내인 나의 손위 동서가 집을 나가버리고, 하나 남은 딸마저 대처로 시집을 가 버리자 홀로 시골에 남게 되었다.
혼자 남은 시골 노인의 삶은 서글픔 그 이상이었다. 나는 시숙을 위해 음식도 실어날랐지만 외로운 시숙의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당의 풀을 뽑고 꽃밭을 만들기로 하였다. 시숙이 혼자 식사를 할 때 마당의 꽃을 바라보면 마음의 적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질까 해서였다.
산청 집에는 돌이 많은 곳이라 꽃밭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끈기라면 남에게 지지 않는 나인지라 시골에 갈 때마다 열심히 마당의 돌을 빼내고 흙을 골라 꽃밭을 만들었다. 양재동 꽃시장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모란, 작약, 튤립, 부용, 수선화 등을 사서 심었고 꽃양귀비, 백일홍 등의 씨앗을 뿌렸다. 빈틈에는 꽃패랭이와 섬초롱을 심었다.
내가 꽃을 자꾸 갖다 심자 시숙이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나의 꽃밭 건사에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좋은 징조로 여겼다. 무언가 시숙의 삶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꽃밭을 조성한 지 3년도 채 안되어 돌밭에서도 해마다 꽃양귀비며 부용, 봉숭아, 메리골드, 작약, 모란 등이 꽃을 피웠다. 그 꽃밭에서 시숙과 함께 쪼그리고 앉아 꽃을 바라보는 것이 참 즐거웠다.
꽃밭이 풍성해지자 시숙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나의 꽃밭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듣자 마당에 정자를 놓고 마을 사람들의 쉼터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은 이상이 내 맘 속에 자랐다. 뻑하면 이상이 들끓어 오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이다.
그런데 시골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집이 다 타버리고 시숙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시골집은 폐허로 버려졌고 나의 꽃밭에는 내가 그토록 사랑으로 돌보던 꽃들은 간 곳도 없고 민들레와 망초, 잡풀 들만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랐다.
나의 강권으로 남편은 병든 봄을 이끌고 이년 전 이 폐허 위에 새 집을 지었다.
그때 포클레인으로 집터를 파자 작은 돌들이 엄청나게 나왔다. 이 돌들로 예쁜 돌담을 쌓기는 했으나 마당을 갈아엎으면서 그전에 가꾸어왔던 나의 꽃밭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작년 봄에는 마당을 조성하고 잔디를 심었다. 마당 귀퉁이에는 작은 텃밭과 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급하게 씨를 뿌려 그나마 맨드라미와 메리골드로 허전함을 메웠다. 그러면서 내년을 기약하였다.
올 초부터 나는 다시 꽃밭을 복원할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마음이 앞섰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화단을 만들고 싶어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꽃씨들을 주문하기 시작하였고 2월경에는 작은 플라스틱 그릇들에 흙을 담아 꽃씨를 뿌렸다.
내가 베란다에 심은 꽃의 종류는 다음과 같았다. 버베나, 드럼몬디플록스, 네메시아, 고데치아, 버바스쿰, 주피터의 수염, 루피너스, 차이브, 숙근솔채, 캘리포니아 블루밸, 팬스데몬, 투베로사, 로도치톤, 겹꽃양귀비, 락스퍼, 리야트리스, 채송화, 나무달리아 등이었다.
아파트 베란다가 따뜻해서였던지, 아니면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물을 뿌려준 나의 정성 탓이었던지 씨앗을 뿌린 후 2주경부터 씨앗들이 왕성하게 싹을 내었다.
꽃씨들이 귀여운 얼굴을 내밀자 내 마음은 벌써 나의 산청집 꽃밭에 온갖 희귀한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하기 바빴다. 나는 노트를 장만하고 계절별로 꽃이 피는 시기와 꽃나무의 크기를 맞추어 모종을 어디에 심을 것인지 그림을 그려보곤 하였다. 그때는 이 희망이 일장춘몽이 될 줄 몰랐다.
그런데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내외가 나에게 손자를 부탁해 왔다.
나는 막 싹이 나오기 시작하는 나의 모종들과 이제 막 태어난 손자를 비교해 보았다. 손자와 꽃모종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제 막 싹이 나오기 시작한 모종들도 돌보지 않으면 그간의 노고가 헛일이 되고 마는 순간이었다. 내 존재 의미가 이렇게 중요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아바타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3월 중순이 되자 참을 수 없어 조금 더 크게 자란 일부 모종을 시골에 옮겨 심었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한파가 몰려와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이때 옮겨 심은 모종들은 다 얼어 죽고 말았다. 마음이 참담하였다. 조금만 더 참을 걸 하고 후회하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4월 초에 미국행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어찌 됐건 모종을 시골에 옮겨 심어야 했다. 그래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남은 모종을 다 싣고 가서 시골 땅에 심었다. 영역을 표시하고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골집 마당을 돋운다고 마사를 들씌운 상태여서 새싹이 잘 자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씨앗들을 마당에 그냥 술술 뿌려두고 미국으로 갔다.
내가 나의 꽃밭에 집착하는 것을 아는 주변 사람들이 가끔 마당에 핀 꽃들의 사진을 미국으로 보내왔다.
4월에 모란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남편으로부터 전해 들었고 5월 초에는 언니들이 돌담 아래에 핀 아이리스들의 소식을 전해왔다. 손위 동서도 가끔 시골집에 들러 꽃소식을 전해왔다.
시골 마당에 그래도 꽃이 조금은 피었구나 생각하며 아쉬운 대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내가 오기 전 이식했던 모종들에 관한 소식은 없었다.
6월에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산청집이었다.
아뿔싸! 마당에 코스모스만 한그득 피어있었다. 내가 슬슬 뿌려준 씨앗들 중 코스모스만 살아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정성을 기울여 심은 꽃 중에는 락스퍼만 제대로 자라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머지 땅을 가득 메운 것은 잡초였다. 잡초 중에서도 가장 퇴치가 어렵다는 쇠뜨기풀이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남편과 언니들, 손위 동서가 그동안 시골집에 갈 때마다 쇠뜨기풀을 뽑았다고 내게 알려왔었는데 저 쇠뜨기풀은 징그럽게도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쇠뜨기풀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 종류의 하나이다.
46억 년 전 최초의 지구가 형성될 때 바다의 해조류가 땅에 정착하여 식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식물은 뿌리와 줄기와 잎으로 분화되고 최종적으로 꽃을 피우는 식물로 진화했다.
쇠뜨기풀과 사촌인 속새는 지구상에 가장 먼저 출현한 식물로 알려져 있다. 줄기와 잎의 분화가 또렷이 나눠지지 않았으며 몸전체에 클로로필을 가지고 광합성을 한다. 쇠뜨기풀보다는 속새가 이러한 특징을 더 잘 나타낸다. 지구 최초의 식물인 쇠뜨기풀이 아직도 지구상에 번성한다는 것은 이 쇠뜨기풀의 생존전략이 탁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나는 땅 속 깊이 번져있는 쇠뜨기풀을 제거하기 위하여 삽으로 땅을 깊이 팠다. 쇠뜨기들이 줄줄이 연결된 채 뽑혀 나왔다.
내가 이름표를 붙이고 심어둔 꽃모종들 중 몇 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하나만 살아남은 버베나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저 연약한 모종 하나가 살아남아 캘리포니아에서 본 아름다운 버베나 꽃밭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니 새로운 희망이 솟구쳤다. 그래 이 얘들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겠지. 그러면 다시 시작하는 거야.
문익점이 붓뚜껍에 넣어 가져온 목화씨 하나가 살아남아 이 땅에 목화꽃이 가득 피지 않았나! 산청은 바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심은 시배지가 아닌가!
나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코스모스들을 난폭하게 뽑아버렸다. 나의 꽃밭에 코스모스만 자라 있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연신 땀을 닦으며 국화모종을 여러 개 새로 심었다. 이제 가을을 대비해야 하니까.
손자를 돌보듯, 어린 식물도 지성으로 돌보아주어야 잘 자라고 꽃을 피운다.
이제 다시 나의 꽃밭 재건에 나설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