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양재천변에 오동나무가 몇 그루가 서 있다. 5월이 되면 이 오동나무에 보라색의 큰 꽃이 핀다. 꽃은 너무 크고 부자연스러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무만 해도 뭔가 언바란스한 데다 길쭉한 나무줄기에는 피목이 매우 발달하여 기괴한 느낌을 준다. 오동나무는 사실 멋진 나무는 아니다. 속성수라서 일 년에 일 미터는 족히 자라고 나무 중에서는 가장 큰 잎을 가지고 있지만, 잎이 별로 무성하지 않아 어찌 보면 나무 중에서는 상당히 못생긴 축에 속한다.
거기다 오동나무가 주는 이미지는 애잔하다. 예로부터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어 오동나무 장을 짜서 혼수로 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람이 죽었을 때, 오동나무 관을 짜서 묻었다는 유래 때문이기도 하다. 관이라는 낱말의 무게도 그렇지만 딸의 혼수라는 개념도 매우 무겁고 슬프다. 옛날 여성의 출가는 축하만 할 수 없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과년한 딸을 두면 결혼을 안 시킬 수는 없었지만, 시집살이는 혹독했고 삼종지덕(三從之德)을 내세우며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 속에서 여성은 숨도 못 쉬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처지를 알기에 딸을 낳고 오동나무를 심는 아버지의 마음은 슬픔과 착잡함으로 복잡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래서 오동나무는 슬픈 나무이다.
가구재로 오동나무가 사용된 까닭은 오동나무가 속성수로 빨리 자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동나무는 10년 정도 자라면 목재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옛날 여성의 조혼풍습을 고려한다고 해도 15세는 지나야 결혼을 했을 터이니, 딸을 낳고 오동나무를 심어도 가구를 만들기에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오동나무는 빨리 자라기 때문에 목재로써는 상당히 가볍고 무른 편이다. 그러니 가공하기 쉬워 누구나 쉽게 가구를 만들 수 있다. 오늘날 유행하는 DIY 가구도 대부분 오동나무 소재이다. 그러면서도 오동나무는 나이테가 뚜렷하여 무늬가 아름다우면서 뒤틀리거나 갈라지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 나무가 내는 독특한 냄새로 인해 좀이나 벌레가 생기지 않으며 습도조절이 잘되기 때문에 건물의 내벽에 오동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
한편, 줄기가 푸른 오동나무가 있는데 이를 벽오동(碧梧桐) 즉 ‘푸른 오동’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벽오동 나무는 귀하게 여겨졌었는데, 그 이유는 벽오동나무에 봉황이 깃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이다. 이 봉황이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성세를 이룬다고 하여 봉황은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장자(莊子)에 의하면
‘봉황은 벽오동이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고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봉황의 문양(文樣)은 고래로 한중일 삼국에서 귀하게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을 상징하는 휘장으로 봉황 그림이 사용되고 있다. 봉황 아래에는 벽오동 꽃이 들어가야겠지만 대한민국인 만치 나라 꽃인 무궁화가 새겨져 있다.
한편, 벽오동을 오동나무와 혼동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에서는 오동나무를 형상화한 동문(桐紋)을 문장으로 사용했고 이것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일본 정부의 상징이 오동나무 형상이 되었다. 일본 내각총리대신의 문장도 동문이며 일본 돈 500엔 동전에도 오동나무 잎과 꽃이 그려져 있다. 일본이 사용하는 동문(桐紋)의 문양은 추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500엔 동전에 그려진 오동나무 꽃은 벽오동 꽃이 아니라 틀림없는 참오동나무 꽃이다.
양재천에는 실용성을 대변하는 참오동나무와 태평성대를 바라는 이상적인 소망을 대변하는 벽오동나무가 모두 있다. 양재천을 걸으면서 우리 사회에도 이 두 가지의 가치가 조화를 이루었으면 하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