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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Sep 29. 2024

19. 원시의 사랑을 나누는 은행나무

<양재천 산책>


은행나무가 양재천변을 따라 이곳저곳 산재해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은행나무가 즐비한 구역이 있다. 영동 6교에서 5교 사이의 미도아파트 쪽 산책길 가로 은행나무들이 양쪽에 도열해 있다. 이곳은 천변 가장 위쪽 산책길에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푸른 가을하늘이 멋진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반면 영동 4교에서 2교 사이의 메타세쿼이아 도로 옆 공터에도 은행나무들이 즐비한데, 이곳은 은행잎이 바닥에 깔려 노란 카펫을 깐 것 같은 가을 분위기를 연출한다. 최근 강남구에서는 타워팰리스 건너 도로 옆의 공터를 정비하면서 은행나무 사이로 산책길을 내고 벤치를 놓아 멋진 공원으로 탄생시켰다. 가을에 그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면 ‘시몬 너는 아는가?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하는 시구가 절로 떠오를 것 같다.


내가 은행의 존재를 인식하는 또 다른 때는 봄철, 수정을 마친 수꽃이 우수수 땅에 떨어질 때이다. 은행의 수꽃은 꽃차례에 1~5개의 꼬리 모양의 꽃이 달리는데(전문용어로 미상화서(尾狀花序)라고 한다) 연노란색을 띠고 있는 이 수꽃은 길이가 2~3 센티미터에 달해 쉽게 눈에 뜨인다. 이 수꽃에 꽃가루가 들어있는데, 숫나무는 바람에 의지해 꽃가루를  암그루의 꽃으로 날려 보낸다. 화분을 방출한 수꽃은 한꺼번에 나무에서 떨어지므로 봄날, 은행나무 아래에서 연노란색의 미상꽃차례에 달린 화분낭이 숱하게 떨어져 있으면 그게 바로 은행나무의 수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이다. 암수딴그루의 경우 암수 양 나무가 근처에 존재하지 않으면 수정이 어렵다. 따라서 진화과정에서 식물은 암수딴그루의 특성을 버리고 암수한그루의 형태로 바뀌어 왔다. 그런데도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의 오랜 전통을 꿋꿋이 유지해 오고 있다. 은행나무는 약 2억 8천만 년 전인 페름기의 화석에서도 발견된 나무이다. 이 은행나무가 원시시대의 사랑을 나누며 아직도 지구상에 살아있다는 것이 놀랍다. 은행나무는 우람하게 꿋꿋이 뿌리를 땅에 박고 서서 변화를 거부하며 옛 전통을 고수하려는 여전사 같기도 하다. 


<씨앗의 자연사>를 쓴 조나단 실버타운은 은행나무의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과정을 ‘식물도 섹스를 한다’는 관점에서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여기에서 잠시 그의 묘사를 인용해 본다. 우선 은행 암나무에는 미숙한 씨앗들이 긴 꽃자루 끝에 달린 채 꽃가루가 날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수나무의 꽃가루 속에는 발달하지 않은 수컷이 들어있는데 이것이 바람에 날려 암나무의 씨앗에 도달하게 된다. 암나무의 수정되지 않은 씨앗(밑씨)은 그 끝의 작은 구멍을 통해 점액성 물질을 분비하게 된다. 꽃가루가 이 점액에 닿게 되면 밑씨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아직 미성숙 상태의 수컷들은 이 방 속에 모여 수정할 때까지 기다리며 성숙할 채비를 한다. 한편 암나무의 씨앗에 꽃가루가 도착하면 밑씨 속의 암컷세포의 발달을 촉진시켜 난자가 수정 준비를 한다. 난자가 수정 준비를 마치면(꽃가루가 도착하고 약 4개월이 걸린다) 암나무는 꽃가루받이 방의 벽을 터뜨려 속에 든 액체를 쏟아낸다. 밑씨 내부가 액체방울로 가득 차면 꽃가루에서 정자가 방출되는데 이 정자에는 섬모가 달려있어 정자세포는 어뢰처럼 난자를 향해 달려간다. 달리기 경쟁에서 우승한 정자가 난자를 수정시키고 씨앗의 아버지가 된다. 

은행나무의 정자가 섬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일본 동경대학의 히라세 교수였다(1895년). 은행에는 식물이 땅에 뿌리를 내렸으면서도 바다에서의 수정(受精) 방식인 정자가 난자를 향해 달려가던 형태가 아직 남아있다. 동물의 경우 수정에 여전히 이 방식을 채용하지만, 식물은 그 후 꽃을 만들고 꽃 속에 암술과 수술을 함께 가지고 수정함으로써 섬모의 존재가 필요 없이 되었다. 그럼에도 은행은 옛사랑 방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자기의 자손을 보호하기 위하여 과육에는 쿠린내 나는 물질을 잔뜩 만들어 넣었다. 은행알이 크고 냄새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어떤 새도 은행알을 옮겨줄 수가 없다.  그래서 은행은 멸종위기종이다. 인간의 도움이 없으면 은행은 생존할 수가 없는 나무이다. 은행은 마치 “죽으면 죽으리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고집 센 용사 같기도 하다.


나에게 은행나무의 첫인상은 강인함이다. 튼튼한 줄기에서 가지를 뻗어 하늘을 향해 팔을 펼치고 서 있는 모습은 위풍당당하고 아름답다. 나는 당당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애인 랜드가 쓴 <아틀라스 슈러그드(Atlas Shrugged)>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이 작품은 무능한 사회주의자 평등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면서 이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당한 창의적이고 똑똑한 지식인들이 사라져 버리면서 사회는 몰락해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틀라스는 거인 신으로서 티탄 신족과 올림피아 신들과의 싸움에서 티탄 신족의 편을 들었다가 제우스로부터 평생 지구를 떠받치고 있으라는 형벌을 받았다. 지구를 어깨에 걸머진 거인족 아틀라스처럼 은행나무는 팔을 하늘로 뻗어 지구를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양재천변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30~40년에 불과하므로 이 은행나무를 보고 지구를 걸머진 아틀라스를 연상한다고 하면 나의 상상력이 과하다고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양재천의 은행나무를 보고 있는 내 눈에는 전에 본 거대한 은행나무들이 함께 보인다. 가장 먼저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1,100년으로 추정되는 나이와 우리나라의 나무 중 가장 큰 42 미터의 키(한때는 67m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사 위기에 처해서 일부를 잘라내어 키가 줄어들었다고 한다)와 둘레가 15.2 미터나 되는 나무로써 그야말로 지구를 받치고 있듯이 우람하고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양평 수종사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종사의 은행나무


절뿐만 아니라 서원에도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는 공자가 행단(杏壇)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사회에서 은행나무가 얼마나 존중을 받았는지는 500년 이상의 보호수에 은행나무가 많이 포진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5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무려 800여 그루나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장수성과 빙하기 이전 자생수종이었다는 점에서 은행나무를 밀레니엄나무로 선정하였다.

은행나무는 바람을 이용해 수정하는 풍매화이다. 풍매화식물의 경우 수분을 위해 곤충을 유인할 필요가 없으므로 꽃은 화려한 색을 띠지도 않고, 향기도 없으며 꿀을 만들지도 않는다. 이런 식물의 대부분은 녹색 꽃을 피우거나 꽃이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 대신 에너지를 아껴 오래 산다. 


원시식물인 은행이 당당히 지구를 받치듯이 아직도 우리 주위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다. 은행 한 알을 맺기까지 얼마나 정밀한 생명의 프로그램이 숨어있는지를 알면 알수록 은행나무는 나에게 생명의 위대함을 깨닫게 한다. 은행알은 자기 보호를 위해 고약한 냄새를 만들고 이로 인해 벌레에 먹히지도 않는 특성이 있는 데다가 공해에도 잘 견뎌 오늘날 가로수로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이 자기 과보호로 인해 은행알을 옮겨주는 곤충을 잃음으로써 페름기 이후 은행나무는 모두 멸종하고 지구상에는 오직 한 종(species)만이 남아있다. 이제 은행은 사람의 도움 없이는 번식할 수 없는 나무가 되었다. 은행은 사촌도 없고 이웃도 없고, 스스로 번식하고 자생하는 군락도 없는 외로운 나무, 마치 지구를 받치고 힘겨워하는 아틀라스처럼 은행나무도 지금 힘겹게 멸종위기를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나무에서 생명에 대한 강한 결기를 느낀다. 


은행알의 쿠린내를 타박하고, 왜 암나무를 심어 산책을 불편하게 만드느냐고 불평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기심의 발로가 아닌가 반성이 된다. 만약 암나무를 없애고 수나무만 가로수로 둔다면 무수한 은행의 정자들은 헛되이 바람을 타고 허공을 헤매다 사라지고 말지 않겠는가? 길가에 무용하게 쓸려 버려져 있는 은행 종자들을 좀 더 애틋한 눈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돌봄이 없다면 멸종 1순위가 은행이라고 하니 우리도 은행나무를 받쳐주며 함께 살아가야 할듯하다. 


그런데 은행나무에서 암꽃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암꽃은 꽃이라기에는 너무 작은 방울 같은 모양으로 은행잎 사이에 숨어서 피는데, 꽃이 피는 시기가 너무 짧아 봄 한 철 잘 관찰하지 않으면 어느덧 결실한 은행 종자의 모양으로 변해버린다.

나는 봄마다 은행나무의 암꽃을 찾아 안달을 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이 은행나무의 암꽃을 작년 봄 마침내 만났다. 4월 말경이었다. 시골에 간 김에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은행나무를 무심히 올려다보았더니 거기에 은행 암꽃이 주렁주렁 피어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대여섯 개의 긴 자루가 나와 있고 그 끝에 녹색의 뭉텅한 꽃이 쌍으로 달려있었다. 사마귀 대가리 같이 생긴 암꽃이 은행잎에 호위된 채 고개를 쏙 내밀고 있었다. 아! 나는 기쁨의 탄성을 올렸다. 


좌측: 은행은 수꽃, 우측: 은행의 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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