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회화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찾아보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는 회화나무가 오래 사는 데다가 거목으로 자라고, 귀한 대접을 받아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유명한 세 회화나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산청 예담촌의 회화나무
산청 예담촌은 나의 시골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예담촌이라고 하면 마치 이웃집인 듯 정답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런데 사실은 시골집에 내려갈 때마다 시간에 쫓겨 이곳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는 못한다. 한 번씩 큰맘 먹고 들르면 잘 정비된 돌담과 오래된 고가들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지정된 장소임을 실감케 한다. 이곳에는 이 씨 고가, 최 씨고가, 이동서당, 사양정사, 망추정 등 귀한 문화유산도 많이 있지만 오래된 감나무, 매화나무, 회화나무 등 자연유산도 풍부히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 양반촌답게 회화나무들이 많이 있다. 특히 돌담 골목을 기웃거리다 마주치는 노거수 회화나무 두 그루는 예담촌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이 회화나무의 나이는 310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한 그루는 비스듬히 누워있고 쓰러질듯한 이 나무를 건너편 다른 나무가 받쳐주듯 안아주고 있다. 그래서 말 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들에게 부부 회화나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부부가 이 나무 아래를 지나가면 백년해로를 한다는 전설도 만들어졌다. 영화 <왕이 된 남자>의 주인공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백년가약을 약속한 로케 장소로도 유명하여 많은 청춘남녀가 이 나무 아래를 다정하게 지나간다. 말하자면 예담촌의 회화나무는 비록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지만 행복한 나무인 셈이다.
이 씨 고가 입구에도 또 한그루의 회화나무가 장대하게 서서 예담촌을 지켜보고 있다. 이 회화나무는 450년의 수령으로 추정되어 예담촌에서 가장 오래된 회화나무로 여겨진다.
8월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회화나무가 미색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안동 천전리 내앞마을의 의성 김 씨 종택의 회화나무
안동 천전리 내앞마을의 의성김 씨 종택은 청계 김진(1500~1580년)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이다. 김진은 자식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아들 오 형제를 모두 과거에 급제시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 아들 중 한 명이 학봉 김성일이었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선조 때 일본에 부사로 파견되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쥐새끼처럼 생겨 전쟁을 일으킬 인물이 못된다고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게 했다고 지금까지 비난받고 있는 그 사람이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진주성으로 스스로 달려가 왜군과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전사하였다.
현재의 이 김 씨 종택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학봉 김성일이 북경의 대저택을 참조하여 중건하였다고 한다.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이 주택은 독특한 구조로 인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집안에 수령 300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불천위를 모신 유명한 양반 집안에 회화나무가 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나무가 특별한 이유는 바른 소리를 하다 금부에서 이 집 주인을 소환하기 위해 보낸 말을 맨 곳으로 유명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선비의 목소리는 왕도 잠 못 들게 할 만큼 카랑카랑하였다. 이 나무에 몇 번이나 왕이 보낸 사자가 말을 매었다니 이 집안의 기개를 짐작게 한다. 양반이란 목숨을 내놓고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이곳의 회화나무는 보여준다. 의성 김 씨 종택의 회화나무는 양반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의엿한 나무이다.
해미읍성의 회화나무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 내에는 수령 약 300년 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회화나무가 유명한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하고 죽이는데 이 나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해미는 조선 중기 1,400~1,5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는 진영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군사를 거느린 무관 영장은 해미 현감을 겸하였고, 해미 현감은 충청좌도의 내포 지방 해안 수비 명목으로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내포지역은 당시 가장 많은 천주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신자들은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마다 대규모로 체포되어 해미읍성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해미읍성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마지막으로 해미읍성 서문 밖과 해미천변(여숫골)에서 처형되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까지 이곳에서 약 1,000명이 넘는 교인들이 순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 감옥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은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채 동쪽으로 뻗어있던 회화나무의 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호야나무라고도 불린 이 회화나무에는 지금도 천주교인들을 고문하는 데 사용된 못이 남아있다. 이후 동쪽 가지는 훼손되어 옹이만 남았고 가운데 가지는 폭풍에 부러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해미읍성의 회화나무야 말로 가장 슬픈 회화나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