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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가을의 전령 억새, 갈대, 수크령 삼총사

<양재천 산책>

by 보현


양재천에 가을의 전령사인 억새, 갈대, 수크령 삼총사가 나타났다. 이들은 본래부터 거기에 있었으므로 이들을 나타났다고 표현하면 어불성설이 되겠고, 가을이 되어 꽃이 피면서 그들의 존재가 드러났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되겠다. 역시 꽃이 피어야 식물은 그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들은 모두 꽃이 피기 시작할 때는 보라색 색상을 띠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보라색이 옅어지면서 흰색으로 바뀐다. 가을 햇살 아래 하얗게 반짝이는 이 풀들을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가을의 전령사들이다.

이들 삼총사는 모두 벼과에 속하므로 줄기 속이 비어있다. 그래서 약간의 바람에도 하늘하늘 흔들리게 된다. 맑은 가을바람에 이들이 몸을 내맡기며 흔들리면 나의 마음도 가을의 맬랑코리에 젖게 된다. 묘한 마력이 있는 삼총사들이다.


억새 종류에는 억새, 참억새, 물억새가 주종을 이룬다. 요즈음에는 억새풀에 속하는 그라스(grass)류도 정원 장식용으로 많이 심는다. 양재천에도 억새, 물억새뿐만 아니라 그라스류도 많이 눈에 뜨인다.

억새의 잎 가장자리는 톱날처럼 날카로워서 손이 베일 정도로 억세다.

억새를 보면 어릴 적 읽었던 <백조의 호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마술에 걸린 공주의 오빠들이 억새풀로 바구니를 엮는 풍경이 묘사되어 있었는데, 후일 이 억새풀을 볼 때마다 그들의 손이 억새의 날에 찔려 고통스러웠을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억새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억새는 마귀가 벌을 내릴 때 사용한 무서운 풀이지만 이 억새꽃이 가을 하늘아래 무더기로 피어 있으면 가을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기도 한다.



양재천의 억새꽃


물억새는 억새보다 크기가 작고 잎 가장자리의 날카로움도 억새보다 덜하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억새가 물억새이다. 이 물억새도 잎의 나비가 3∼5cm인 것은 넓은잎 물억새, 너비가 5∼10mm인 것은 가는 잎물억새라고 한다.

억새가 본래부터 양재천에 자라던 식물이라고 하면 물억새는 일부러 조성한 억새류이다. 장마가 할퀴고 가면 인부들이 양재천변에 물억새를 새로 심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저 잡초가 연출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을 풍경도 이렇게 사람의 손으로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High Line)이 생각난다. 옛 철도길을 산책로로 조성한 이 길섶에도 무심한 듯 억새류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잡초처럼 보이는 이 정원 풀들도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는 설명문이 붙어있었다.

양재천의 가을 풍경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성되고 관리되고 있는 풍경임을 알면 그 누군가에게 감사하게 된다.


양재천의 물억새 꽃밭


한편, 양재천에는 그라스에 속하는 억새 사촌들도 많이 식재되어 있어 가을 정원의 분위기를 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라스는 풀이란 보통 명사이지만 벼과식물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에는 억새, 갈대, 수크령 등이 포함되지만 원예종묘상에서는 억새 아류의 장식용 풀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양재천의 그라스류 억새들


갈대는 습지 또는 냇가에 군락을 이루며 자란다. 양재천에도 천변에 갈대무리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갈대는 속이 빈 벼과 식물이므로 바람에 잘 흔들린다. 그래서 베르디는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여자의 마음을 갈대로 비유하였고,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하여 인간의 위대성을 갈대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구약 이사야서에는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라고 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데 갈대를 차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갈대는 흔들리고 나약하고 꺾여 상하기 쉬운 풀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갈대는 군락을 이루고 자라므로 혼자서 흔들리고 넘어지고 부서지지는 않는다. 바람에 슬쩍 흔들리다가도 다시 일어선다.

양재천의 홍수 피해에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 일어서는 식물도 갈대이다. 그래서 몇 번의 홍수 피해를 입은 후, 강남구에서는 이곳에 조성하던 꽃밭들을 포기하고 갈대를 심고 있다. 자연상태의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강남구의 결정에 나도 마음의 찬성을 보낸다.


우리 아버지는 갈대의 어린 꽃을 뽑아 빗자루를 잘 만들어주셨다. 아버지는 뒷산 개울가에 핀 갈대꽃을 뽑아 그늘에 말린 다음 부들 말린 줄기에 색색실로 단단하게 묶어 빗자루를 만드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 손에서 탄생하던 예쁜 빗자루를 마치 마술을 보듯이 보던 기억이 난다. 가을이면 빗자루 여러 개를 만들어 벽에 걸어두고 썼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양재천에는 가을마다 갈대꽃이 피고, 그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양재천의 갈대꽃


수크령은 양재천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 전령사 풀의 하나이다. 수크령이란 이름은 비슷하게 생긴 식물 그령(암크령)에서 나왔는데, 그령보다 뻣뻣하고 이삭이 크다는 의미에서 수크령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풀은 강아지풀처럼 생겼는데, 강아지풀보다 키도 크고 꽃도 훨씬 크다. 잎은 억세지만 억새와 달리 부드러운 편이다. 다만 줄기가 질겨 이것을 엮어두면 말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기도 하단다.

이 풀을 은혜를 갚는 풀이라고 하여 결초보은(結草報恩)의 풀로 부른다.

사족으로 결초보은의 유래를 이야기하면 이렇다. 춘추시대 진(晉) 나라 군주 위무자가 죽으면서 자기의 애첩인 서모를 자기와 같이 순장시켜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위과는 서모를 순장시키지 않고 살려 보냈다. 세월이 흐른 후 이웃 진(하) 나라에서 진(晉) 나라를 침략해 왔다. 그때 위과가 진(秦) 장수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런데 서모의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풀을 묶어 올가미를 만들어 위과가 도망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이 풀이 바로 수크령이고 이때부터 풀을 엮어 은혜를 갚는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다 아는 이야기를 또 읊으니 쑥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나도 수크령이 결초보은의 그 풀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여기에 적어 본다.


양재천에는 가을마다 수크령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올해는 지난여름의 장마로 인해 양재천변이 수해를 심하게 입어 수크령도 예전 모양 같지 않다. 결초보은의 이 풀이 다시 아름답게 살아나 옛이야기를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


양재천의 수크령


위의 세 삼총사 말고도 양재천의 가을을 빛내주는 조력자 풀 종류에 핑크뮬리가 있다. 양재천에 핑크뮬리가 피면 분홍 파스텔을 문질러놓은 듯 주변이 꿈결같이 변한다. 가을 산책객들은 이 풀 속에 잠시 서서 휴대폰의 카메라를 눌러댄다.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꺼내게 만든다. 세계공통의 모습이다. 역시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은 마음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다.


양재천의 핑크뮬리


가을에는 가을꽃이나 단풍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가을을 상징하는 억새류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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