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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씽 Mar 29. 2022

무례한 연재 제안

무례함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신중함

 3월의 첫 주 어느 날. 내가 운영하는 SNS의 개인 메시지로 한 제안이 왔다. 작년 11월부터 웹툰 형식의 그림일기를 꾸준히 쓰고 있었는데 내 이야기와 그림이 맘에 들어 나의 육아 웹툰을 연재하고 싶다는 한 회사. 아기용품 회사나름 엄마들 사이에선 인지도 있는 기업이었다. 그림일기를 꾸준히 쓴 지 4개월. 너무 기분 좋고 뿌듯한 성과였다. 내가 좋아서 쓴 글과 그림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뿌듯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마냥 들떴다.    

 

 출산 전까지 한 기업에서 4년, 대학교에서 1년, 프리랜서로 반년  5년을 디자이너로 일했던 나. 그리고 5년 일을 쉬었던 나였다. 늘 개인 커리어를 고민하던 나에게 이 솔깃한 제안은 큰 행운이었고 이에 요동치는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게다가 지원한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나를 보고 먼저 제안이 오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다.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받은 뒤 담당자와 통화를 했고 연재 시 콜라보 진행방식, 계약금 협의, 계약금 지급 방식 등 모든 이야기가 순조롭게 오고 갔다. “작가님~ 이 사항을 내부 보고 하고 오늘 안으로 계약서 보내드릴게요! 통장 사본과 신분증 사본 바로 보내주세요!”를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렇게 들뜬 마음을 간신히 붙잡아두고 차근차근 이메일 주소, 통장 사본, 신분증까지 모든 것을 친절히 보내주었다. 훗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 채.     


그렇다. 결론부터 쓰자면 당장 모든 것이 잘 진행될 줄 알았던 계약 건은 모두 무산되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상황은 이렇다.

1. 구두로 계약한 당일 계약서를 곧바로 주기로 했으나, 계약서가 오지 않았다.

2. 주말이 지난 뒤, 화요일 문자로 '계약서 초안 작성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문자를 받는다.

3. 한주가 흘러 연락이 와서는  담당자가 코로나에 걸려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라 한주 업무 중단한단다.

4. 또 한주가 흘렀지만 연락이 없고 결국 금요일이 와버렸다.

 처음엔 담당자가 신입인가?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네 생각했다. 그러다 코로나 감염이라니.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그랬구나 이해했다. 3주 차가 되는 순간 직감했다. 아! 일 진행에 문제가 생겼구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긴 기다림 끝에 3주 차 끝자락 내가 먼저 연락을 취했다.


담당자님 안녕하세요~ 회복은 잘하셨는지요. 다름 아니라 진행하기로 했던 연재의 계약건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이번 주엔 연락을 주시겠지 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 연락드려요~진행이 미뤄지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차질이 생겨 취소가 된 것인지 답변 주시면 감사해요!


 그리고 온 답변.


안녕하세요, 작가님. 정말 죄송해요! 오늘 다른 후보 작가분이 제안해주신 기획 방향으로 진행 확정되었어요. 내부 논의를 마친 후에 연락드리려던 게 본의 아니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이미 예상을 어느 정도 했지만 배신감이 상당했다. 회사 상황이 어떻든 계약을 하기로 한 나에게 일말의 얘기도 없이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하다니? 후보 작가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 작가에겐 제안서까지 받았다니! 그럼 당장 계약서 쓰자며 개인정보 달라고 한 건 뭐야? 다른 작가와 진행 중이면 나에게 먼저 연락을 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황당하고 속상해서 눈물밖에 안 났다.     

 

 3주의 시간이 가는 동안 난 마음이 붕 뜬 채로 이리저리 부유하다 내동댕이쳐진 비참한 기분이었다. 날뛰는 기분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스토리에, 그림에 정말 많이 고민하고 또 진행 중이었는데! 그동안 소진했던 아까운 내 마음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렇게 무례하다니! 문자를 받고 1시간 정도는 감정이 주체가 안 되었다.


 담당자와 통화하며 감사합니다를 스무 번도 넘게 읊었던 내가 바보 같았고 바로 보내달란다고 휘리릭 개인정보를 전송한 것이 한탄스러웠으며, 너무 좋아 들뜬 꿈같은 일을(당연히 연재할 줄 알았다.) 참지 못하고 가족들과 친한 지인들에게 발설한 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비슷한 주제로 나보다 훨씬 인기 있고 재미있는 육아 웹툰을 쓰는 작가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뭐라고. 까지 생각이 갈 뻔하다가 생각을 멈췄다. 이 상황을 나에게 원인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내가 할 것들을 했고, 그 과정 중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긴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더 이상 좌절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정신 차릴 수 있었던 건 가족들, 지인들의 고마운 위로 덕분이다. 그들은 내가 경력을 멈추고 마음 앓이를 얼마나 했는지 알기에 이 상황에 보탬이 되고자 진심을 다 해주었다. '괜찮아, 다 잊고 지금처럼만 계속해, 더 좋은 기회가 올 거야'로 그들의 위로를 추려볼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 나의 이야기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그 결과가 좋았을지 나빴을지 해보지 않았기에 결과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에 굳이 미련을 두지 않으려 한다. 확실히 짐작할 수 있는 건 그 무례한 회사와 연재를 함께했다면 일 진행함에 있어서도 분명 무례했을 것이고, 그런 회사와 내 소중한 이야기를 함께 한다는 건 썩 좋은 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일이 마무리된 것이 어찌 보면 참 잘되고 감사한 일이다.

      

 솔직히 인지도 있는 회사에서 내 이야기를 연재하게 되면 좀 더 유명해질 것이고 그러면 내가 조금 나아 보일 수 있다 생각했다. 이 일을 겪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돈 몇 푼으로 소중한 나의 이야기, 그리고 '나'를 너무 쉽게 내주려 했던 건 아니었는지 덜컥 두려웠다가 어쩌면 잘 마무리된 이 상황을 안도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찾아온 기회와 환경에 기대기보다 '나'와 '나의 이야기'에 조금 더 진심을 담고 정성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휘몰아치던  마음이 훨씬 잔잔하고 편안해졌다. 잠시 흔들린 내면을 애써 부인할 수 없지만, 나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건재하기에 다시 힘을 내보고 싶다. 3주 동안 연락을 기다리고 애태우면서도 내가 하던 일인 그림과 글을 꾸준히 해 나간 일은 참 잘한 일이다. 오히려 연재를 준비하며 스토리를 10개 정도 확보해 두었으니 당분간 스토리를 구성하는 데에는 조금 수월할 것 같다.      

 


 마지막 기도 차지 않는 담당자의 문자를 보고 최대한 정중히 답변했다. 싫은 소리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충고까지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동댕이 친 티끌같이 작디작은 작가 하나가 본인 회사의 소중한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작은 자 한 사람을 소홀히 대하는 그들의 아마추어적 정신이 과연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을지 의문을 던져본다. 뭐 사실 내 알 바는 아니다 이제!


 조금은 씁쓸하지만 이번 기회에 신중함에 대해 배웠다. 계약서 쓰기 전까지는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며, 기분 좋다고 주변에 함부로 발설하는 것도 내게 좋지 않다는 것. 또한 나를, 나의 이야기를 어느 곳에 또는 누구와 함께 공유할 때에도 좀 더 신중히 잘 판단해야 할 것이라는 것까지. 그것이 바로 어디서 올지 모르는 무례함들에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평온한 마음을 되찾은 나는 오늘도 역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내 장점 중 하나인 회복탄력성이 이럴 때 참 빛난다. 한 번씩 이 일이 문득 스칠 때마다 잠깐씩 인상은 구겨지겠지만, 이번 기회에 좀 더 단단해진 마음의 근력으로 더 좋은 그림과 이야기를 쓰고 또 고민해 보아야지 다짐한다. 어떤 파도가 나를 덮쳐도 내가 젓던 노를 꽉 잡고 지금처럼 꾸준히 나아가지. 언제가 되었든 또 나를 집어삼킬만한 파도가 다가오더라도 신중함을 잃지 않고 '나'를 지키는 초심을 꼭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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