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여전히 빛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by 삶예글방

2025년 11월 15일 문장밥



새로 들어간 일터에서 일을 한 지 이제 딱 2주 되었습니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시스템에 맞춰 일을 배우는 중이에요. 여전히 미숙한 게 많고, 종종 실수를 저지릅니다. 오늘도 배달 주문이 들어온 음식을 내어 보내야 하는데, 재료 일부를 빼고 만들어달라는 요청사항을 미처 보지 못하고 기본으로 만들어 보내버렸어요. 홀과 주방 모두 함께 이중 확인을 하는 것이 맞겠지만, 최종적으론 제가 한번 더 확인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 책임이라고 인정하고 말씀을 드렸어요. 고객에게, 매니저님에게, 점장님에게 거듭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사과를 하고, 본사 보고용 반성문 비스무리한 쪽지를 마감 때 써놓기로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죄송해요, 매니저님. 꼼꼼히 챙겼어야 하는데,,

너 그거 실수가 아니라 습관이야.


책 친구들과 비밀독서회로 함께 읽고 있는 하정작가님의 책, 「 이상한 나라의 괜찮은 말들 」 책에선 실수를 얼마나 서로가 포용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는지에 대해 아주 유쾌하면서도 아찔한 에피소드로 함께 다루는데요, ( 이 링크에서 해당 문장밥을 맛보실 수 있어요 ) 그 부분에 대해 감상을 나누며 모난 부분들을 어떻게 서로 감싸며 나아갈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 씁쓸했습니다. 내가 혼자 관대하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환경이 실수나 결점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라면 쉽지 않겠구나. 현실과 책 속 이야기는 역시 다른 건가? 하고요.


저는 엄연히 현재 적응 기간, 그러니까 인턴으로 계약을 맺고, 한 달간 배우는 시기를 갖고 일하기로 약속하고 일을 시작했는데요. 한 주 만에 곧 잘 적응하는 저를 보고 아무래도 점점 기대와 욕심이 커진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입사한 지 2주 만에 4~5년 이상 일한 경력자들만큼의 완성도와 완결성 있는 일처리를 바라는 공간에서의 엄격한 기대치도 참으로 야박하다 느끼면서도,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실수하지 않았을 텐데 왜 실수에 예민한 공간에서 거듭 실수를 연이어 저질러버렸을까 스스로 한탄하기도 했답니다.




잘할 수 있는 일, 익숙한 일을 두고 낯선 일, 하지 않던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일이란 참으로 사람을 초라하고 어리숙한 아이처럼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신선한 환기가 되는 한편, 이렇게 미숙함에서 오는 구멍을 마주하게 될 땐 여러모로 주눅이 들기도 하고 힘이 빠지기도 하는 거죠.


그러던 차에 밥을 먹으러 나와서 샐러드를 시켜놓고, 부리나케 독서노트를 펼쳤어요.


지금의 나에게 샐러드보다도 문장밥 처방이 시급하다.



한병철 철학가의 책들을 찾아 읽고, 필사와 생각을 메모해 둔 페이지를 펼쳤어요. 본문에 인용된 한 편의 시를 옮겨 적어 두었더라고요. 오늘의 양식이다. 싶었습니다.


별은
여전히 빛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파울 첼란의 시 「스트렛토 」


저자의 책을 편집해 온 편집자의 글을 읽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더군요.




피로사회와 불안사회에서 한병철의 책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익을 좇아 책을 만든다는 건, 한병철의 사유를 경유하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니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어떻게 되든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다.”_본문에서). 모름지기 책의 역사가 그러했으며, 수십 년째 계속되는 ‘출판 불황’의 전설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건재한 건 바로 책의 정신 때문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비평가들은 자기더러 비관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은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불가능함과 부정성을 직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는 사람. 불안을 무기로 시민을 겁박하는 사회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완전히 다른 삶의 형태를 열망하는 사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시도되지 않은 것, 태어나지 않은 것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 도무지 장악되지 않는 타자를 긍정하며 혐오와 고립에 맞서는 사람. 사랑의 종말에 맞서 사랑을 재발명해내는 사람. 성공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하는 사람. 불안과 우울이 엄습할 때면 파울 첼란의 시를 곱씹으며 버텨내는 사람.



불안과 우울이 엄습할 때면 파울 첼란의 시를 곱씹으며 버텨내는 사람.


그가 불안과 우울의 시기에 낙심하지 않고 아름다운 시를 곱씹으며 버티고 기록해 준 덕분에 저에게도 소화할 양분이 생겼네요. 반짝이는 문장들로 광합성 충분히 해준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는 오후를 보내봐야겠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는 날에도,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 일이 아닌 사람 자체의 평가를 받게 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한다고 말해봅니다. 나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오후엔 조금 더 잘 일해 보자고, 이곳에서 좋은 것들만 배워서 남겨가자고요.












나은 작가소개 최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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