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실격 」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매일 하루에 한 편씩, 여섯 명의 글방 친구들과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책방지기 사생활실록이 올라가는 목요일, 그러니까 제 글을 쓸 차례가 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이전에 글쓰기 모임에서 써둔 글을 다듬고 더하여 올리곤 했기 때문에, 사실 원고는 넉넉히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갑자기 벼락처럼 일어난 일들 - 그러니까 친척 동생이 스스로 생을 끊어내 버렸고, 나의 몸엔 이상이 생겨 수술을 하게 됐고, 소중한 생명이 가족에 찾아왔고, 또 소중한 어떤 이는 위중한 상태를 맞이할지 모른다는 소식- 때문에, 어쩐지 써둔 글을 쓰지 않고,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마음을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지난주 연재에 쓰고 싶었지만, 도저히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결국 써둔 글을 우선 올렸지요. 그리곤 벌써 또 목요일이 다가왔습니다.
물론 매일 아침이고 밤이고, 틈나는 대로 종이에, 컴퓨터 메모장에 휘갈겨 마음을 쏟아내곤 있었지만, 솔직한 지금 나의 마음을 마주하여 적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겪은 시간과 공개되는 시간의 차이가 없이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올리는 일이 두려웠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일주일을 계속 회피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오늘도 꺼내지 못할 듯합니다. 꺼내게 되는 데에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꺼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너저분하게 엉켜 있다 하더라도, 지금에야만 꺼낼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봅니다.
2025. 7.1
친한 동생의 소개로 <인간 실격> 연극을 보게 됐다. 만화책으로만 봤던 게 아쉬워서, 공연 예매를 해두고는 원작 소설을 읽었다. 6월 마지막주는 요조의 삶과 함께 했다. 자전거를 타고 아쳅토에 가면서, 위어도우로 아르바이트를 가면서도 오디오북으로 요조의 삶의 독백을 듣곤 했다.
정말이지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하고 으스스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애당초 그건 웃는 얼굴이 아니다. 이 아이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아이는 양손을 꽉 쥐고 서 있다. 사람이란 주먹을 꽉 쥔 채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세상을 향해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이 드러날까 숨기고 또 묻으며 살았던 사람.
그렇지만 절실히 가족에게, 사회에 속하고 싶었던 사람.
순수하게 연결된 사랑을 바랐던 사람.
그래서 철저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과장해서 꾸몄던 사람.
하지만 어쩐지 매번 그 시도가 끔찍하게 실패하고
노력할수록 삶이 엉켰던 사람.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사람.
하지만 끝끝내 스스로에게도,
세상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
내가 읽은 요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연기한 지금 시대의 연극은 어떤 모양일까, 너무 궁금했다. 연극 <인간실격>은 연희예술극장에서 열렸고, 뮤직 플레이 시어터 - 라는 컨셉으로 기획 됐다. 밴드와 배우, 그리고 사각 화면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공연 자체는 1인극으로 구성 됐는데, 내가 보는 날은 주인공인 요조를 여성 배우가 연기했다. '공지수' 배우였다.
너무 슬펐다
그녀의 밝은 움직임이
베이스 사운드의 존재가 감정을 더 극적으로 몰고 갔다.
숨어있을 땐 몰랐던 밴드 사운드가 극 중 내내 함께 호흡하며 만들어가니 모두가 집중해서 요조의 삶을 애도하듯 그리는 느낌이 들었다. 신나고 즐거운 장면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눈물이 났다.
의미 있는 공연 방식
새로운 전달
디지털 미디어와 퍼포먼스 행위예술의 조화
긴 내용을 함축시키는 노래와 몸짓의 힘..
어떻게 표현을 해낼까 싶었던 부분들도 정말 감각적으로 표현해 냈다
공지수
여자 요조
그녀가 해석한 요조는
조금 더 화가 많고
조금 더 거침없었다
새로운 해석이었다
남장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요조의 삶을 해석해 내어 다행이고 좋았다.
안심이 됐다.
그래서 새로이 기대되기도 했고
무대 공간이 입체적으로 관객석에 섞여있어서, 온 공연장을 앞 뒤 옆으로 오가며 연기했는데, 음악연극이라 춤과 노래를 계속 함께 하다다보니 엄청난 체력 소모를 하는 듯 보였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호흡을 내쉬며 대사를 겨우 뱉을 땐 진짜로 삶자체가 고달픈 그 긴박감과 지치는 그 처절함이 호흡으로 느껴졌다.
마지막 맨몸차림으로 온몸과 벽과 바닥에 콩테로 크로키를 할 때, 글이 아닌 몸짓으로 이렇게 애통한 마음을 아름답고 슬프게 표현할 수 있구나 - 싶었다.
마음이 저렸다.
감싸주고 싶었다.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았나 싶은데, 몇 번의 자살 시도에도 살아남았던 건 저주였을까, 축복이었을까?
진실된 연인이길 바랐던 '스네코'와의 호흡.
말없이 몸짓으로 둘의 운명적인 연결을 그려낸 게 충격적으로 좋았다.
공연을 보고와선, 집에 와서 노트에 적었다.
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질문이 멈출 수 없는 날들 속에서
갑자기 만나게 된 책과 연극. 어떤 삶이 옳은 것일까?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답이 있는 걸까?
삶에 끝엔 뭐가 있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언제 우리는 '인간'이 되는가..
이렇게 적고 있는데 전화를 받았다.
아빠였다.
"딸, 지금 전화 괜찮아?"
"응 아빠, 왜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 예은이가 죽었단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은이가 갑자기 왜."
"지가 스스로 그랬단다."
아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그냥 계속 물음표만 가득 차올랐다. 왜,,,
그리곤 노트에 적었다.
예은이의 죽음.. 왜..
2025. 7. 8
사랑해주지 못한 이가 스스로 죽었고,
사랑하는 이가 새 생명을 품었고,
그러느라 아프고,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이는 병세가 악화되었고,
내 자궁엔 암세포 병변이 발견되었고, 수술을 해야 한대고,
새로 모집을 시작한 독서모임은 신청자가 0명이었다.
이달까지 해주기로 했던 재산 분할은 현금을 모아서 삼분의 일만 먼저 보냈다. 나머진 연말까지 해주기로 했다.
저축 보험은 이번 달에도 납부를 하지 않으면 해약 된다고 통보가 날아왔다.
쉽지 않은 날들이다.
좀처럼 웃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빠르게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런데 예은이의 장례식에 다녀오곤 생각 자체를 부끄러워하게 됐다.
장례식엘 다녀오면, 그저 빨리 죽어야겠다는 나만 생각한 결정에 부끄러운 마음이 생긴다. 주저하는 마음.
남은 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을 품게 되는지 절절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 소용없는 '내가 이렇게 했다면,, 죽지 않았을까?'를 저마다 계속 렉 걸린 컴퓨터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정말 아무 소용없는 말인데, 계속 '이랬다면' '그랬다면' '조금만 했다면'을 얘기하느라, 계속 틈틈이 울었다. 아까운 삶이었다.
스물일곱. 삼촌 장례식에서도 가장 씩씩하게 모든 과정에 앞장서 일하고, 가족들 챙겼던 너. 언제나 과할 정도로 밝고 당당해 보이던 너.
장례식에 다녀온 다음날 유서가 발견되어 읽고는 마음이 아파 나도 죽고 싶었다. 너무 슬프고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곤 벌써 일주일이 지났구나.
그리고는 여전히 나도 살아있구나.
인간실격 연극을 보고 와서부터였다.
그로부터 내내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무엇을 위해 어떤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삶을 더 가볍게 만들고 싶어졌다.
언제든 가볍게 떠날 수 있게..
없이도 살아졌던 책들을 정리하고,,
어차피 입는 옷들만 입으니 그것들을 더 자주 빨아 입고,,
보내줘도 될 물건들을 보내주는 거다.
그건 잘 죽기 위한 준비일 수도 있고,
죽기까지의 시간을 더 잘 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미지의 서울 드라마 속 할머니의 대사가 떠올랐다.
아무리 추저분해 보이는 짓이어도,
살기 위한 행동은 다 용감한 거야,
예은이가 알았다면, 어떤 짓이든 해서 용감하게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도 그렇게 추저분하지만 무섭지만 구질구질해도 질기게 살고 있는데. 내가 말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무슨 소용인가. 이제 와서..
하지만,,
소용으로 살수만은 없으니까
그냥 기록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물어보지 않은 이에게 알아서 알릴 필욘 없으니까.
그리고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저 내가 직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작년의 동굴 속에 갇혀 있던 나와 같은, 스스로 생을 두고 휴식의 삶을 선택하고 떠난 예은이와 같이 누군가 비슷한 상황에 몰려 있는 이에게 자그마한 가능성이나 위로의 실마리라도 주고 싶을 뿐이다.
동정받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남기는 것이다.
예은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그게 나일수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살아갈 힘을 실패하고 비참하고 아무것도 붙잡을 게 없어 보이더라도, 살아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지만 여전히,
슬프다..
너무 슬프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을까.
닿게 할 순 없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짊어지고 싶지 않았던 날들이다.
그 슬픔이나 무게가 나에게 옮겨올까 봐
내 삶이 같이 너무 무거워질까 봐
의도적으로 눈 돌리고 피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돌아가도 할 말이 없다.
그저 망연해할 뿐이다.
그래놓곤 손쉽게 고모부를 원망했다.
고모를 원망했다. 왜 자식을 그렇게 두었냐고.
왜 그 상황이 되도록 말리지 못했느냐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스스로를 누구보다 탓하고 원망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들보다 내가 더 나은 부분은 단하나도 없고, 도리어 예은이에게 어떤 존재감도 주지 못했던 건 사실이니까..
살고 죽는 일.
나는 언제 어떻게 죽게 될까.
2025. 7. 7
월요일 밤, 아쳅토 독서모임 때 꺼내든 책 「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투병 중인 철학자와 의료 인류학자 두 사람의 필담으로 잔잔히 질병과 죽음에 대해, 또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낸 이야기다. 이렇게 절절히 마음을 만져줄지 모르고 지난달 서가에 사둔 책이다.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 모른다'는 통보를 받고도 생을 이전처럼 살아가려는 철학자의 편지가 너무나도 귀한 책처방이 되어 주었다.
결국 저는 변함없이 일에 허덕이고, 즐거울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벤트에 참여하며, 생각 없이 의욕만으로 일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암은 낫지 않았으며, 지금도 ‘갑자기 상태가 나빠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속 한편에는 남아 있지만요.) 이렇게 겁내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은 그때 이소노 씨가 보내준 메일 덕분입니다. 새삼 다시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네요.
저 역시 다음 달에 갑자기 무슨 일을 겪을지 모릅니다. 단순히 병을 진단받지 않았을 뿐, 알고 보면 제가 미야노 씨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을지도 모르지요. (⋯⋯) 리스크란, 위험성이란 무엇일까요? 점점 더 모르겠습니다.
(⋯⋯)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아. 그랬구나. 모두 똑같이 ’갑자기 몸이 아플지 ‘ 모르는 거구나. 그럼에도 눈앞을 보며 살아가는구나.
이 책을 읽다 하나의 질문이 피어올랐다.
모두에게 죽음은 분명히 다가온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두고 노력을 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곤 내게 일어난 일을 책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꺼내기도 했다.
실은 언제든 죽을 수 있고, 죽고 싶다고, 삶과 죽음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며 매일을 마지막처럼 살고 있어요. 그런데 장례식에 다녀오고, 오늘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워지는 마음이 들었어요. 적어도 아직은, 스스로 생을 끝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 모습 응원하고 싶어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얼마나 아파하고 힘들어할지 아니까 도무지 미안해서 그런 짐을 두고 떠날 수 없어서
그래서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싶은 생각을 겸손히 집어넣게 되었어요..
조용히 들어주던 책 친구 이도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나은 님이 책을 참 많이, 다양하게 넓게 읽는 사람이라 다행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의연하게 담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무작정 낙관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면서요.
과연 그럴까?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 나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생을 이어가는 선택을 골랐으니까.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인생을 배우다」, 「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이런 치열한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읽어둔 게 도움이 된 것일까.
전쟁 속에 가족을, 자식을 잃고 살아간 작가님들이 생각났다. 나라면 살 수 있었을까. 다시 쓸 수 있었을까.
2025. 7. 9
핸드폰 요금을 더 알뜰한 요금으로 낮췄다.
배고프지만 냉장고를 털어 먹는다.
밖에서 사 먹으면 또 돈이니까.
속옷을 사고 싶지만 하나를 더 열심히 빨아 입기로 한다.
망가진 건 과감히 버린다. 버릴 것이다.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더 검소해지고 가벼워질 것이다.
내가 품을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낼 것이다.
아쳅토 월세일, 카드값 결제일, 내 보험일, 수술일, 계속 돈 낼 일은 다가오겠지.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죽을 것만 같지만 살아있다.
작년에 난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았다.
슬퍼서 죽을 것 같았다.
슬픔에 잠겨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
그렇게 슬픈 일을 마주하고도 지난 일요일엔 신나게 웃었다.
그렇게 웃은 적은 오랜만이었다. 아주아주 오랜만..
그리곤 브런치에 차곡차곡 연재해 온 글을 보고 트레바리 독서모임 파트너를 제안받았다.
책 친구분의 영상 편집 과외 신청을 받았다.
삶은 이렇게 들쑥날쑥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럽다.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씩 해나갈 수 있을까?
자신 없지만 해봐야겠지?
주저앉고 싶어지고, 그냥 겨울잠 자는 곰처럼 들어가 있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또 궁금해서 나오겠지. 그 드라마 뒤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지?
그 책을 쓴 철학자는 어떻게 잘 살고 있으려나? 교토에 가서 삶이 좀 나아졌을까? 생을 마무리했을까?
그 친구는 일하며 자신을 놓지 않고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까?
갑자기 생긴 무게와 책임에 무너지지 않고 잘 견디어가며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있을까?
엄마는 일을 많이 하느라 너무 힘들진 않을까?
아빠는 새 일을 찾았을까? 어깨는 괜찮을까?
토리는 더운 날 건강히 잘 지내고 있을까?
딸을 먼저 보내고 고모는 어떻게 살아가시려나?
언니를 보낸 솔이는 그 슬픔을 어떻게 안고 살아가려나?
우리 서로는 언제 엄마 아빠 입을 떼고, 걷기 시작하려나?
수린과 나는 건강하게 계속 아쳅토를 지켜갈 수 있을까?
동생 찬이는 하고픈 일, 자신을 오롯이 서있게 하는 일을 찾으려나?
그리고 태풍의 눈 속에서 예민하게 떨고 있는 내 곁에서 나를 웃게 하고, 먹고 자게 하는 안식처이자 동거인, 더위에 아주아주 취약한 룸메이트 랑이는 서늘한 바람 부는 가을날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비건 여자친구와 살고 있습니다. 글을 써서 책을 내보고 싶다고 선언했는데, 어떻게 첫 삽을 (?) 뜨게 될까?
궁금해서,,
아직은 살아야 한다. 눈물 나게 고마운 날들 속에서.
「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책에서 하이데거의 「 존재와 시간 」 문장을 인용한다.
분명히 다가오는 죽음 앞에, 다만 지금을 살아내야지.
용기로 보이고 싶은, 혹은 용기를 주고 싶은
추저분한 날들의 기록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