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불루 儉而不陋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2025. 2. 27
작년 10월 말, 안산에서 망원으로 이사를 왔다. 이혼 서류는 10월 초 정리 됐으니 별거 7개월 만의 일이었다. 모든 걸 정리하는 데에 1년 남짓한 시간을 지내 왔구나. 시간은 이렇게 황망하게도 빠르게 흐른다. 그 빠르게 휩쓸어가는 시간 중에 어떤 것들이 얼마큼 쓸려내려 갔는지 알아챌 시간도 없이 새로운 봄을 맞이했다. 새로운 동네에서, 그리고 색종이를 두 번 접은 것처럼 네 배 작아진 집에서.
모든 고정비를 줄여야 했다. 안산 집에서 하던 에어비앤비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됐고, 큰 집을 관리하며 망원으로 출퇴근하며 기름값과 자동차 할부까지 내는 삶은 사치였다. 시간도 체력도 많이 쓰였다. 차도 팔고, 집도 내놨다. 걸어 다니며 일하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좁더라도 아쳅토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집을 찾았다.
운이 좋게도 망원시장과 아쳅토 모두 3분 거리인 곳에 방을 찾았고, 빠르게 계약했다. 그리곤 이사일도 빠르게 다가왔다. 많은 짐과 가구를 나누거나 팔고, 버렸다. 살림살이를 많이 줄인다고 줄였지만, 이삿날 실감했다. 진짜 정리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두 명이 4년간 늘려온 살림을, 생활 방식을 이고 지고 망원동 원룸으로 와버렸다. 이삿날 방 안을 천장까지 가득 채운 박스를 보며 박스 중 하나에 들어가 숨고 싶었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로 3230, 가로 2920의 3평 남짓한 방에, 2평 정도의 주방 겸 거실, 보일러실 겸 세탁실과 화장실. 이전 집이 인테리어 공사하시는 분들 말로는 실평수 기준 30평 정도 됐다고 하니,, 삼분의 일로 줄여온 게 아니라 거의 십 분의 일로 줄여 온 것이었구나,, 체감한다. 모든 살림을 5평 남짓한 공간에 놓았으니 못해도 육분의 일로 줄여온 것이다. 살림도 물건도 그만큼 더 줄였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인지한다.
그렇게 망원동 생활을 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가벼운 삶의 맛을 만끽하기도 하며 중학교 이후로 낮 시간에 여유와 휴식이 간헐적으로 생기는 생활을 누렸다. 우선 직주근접의 삶은 행복 그 자체였다. 망원 시장에서 장을 봐서 그날그날 야채와 두부 등을 사 와 볶거나 구워 먹었다. 혼자 먹는 밥은 열에 아홉 이상 직접 해 먹을 수 있게 됐다. 식당에 가서 주문하고 음식을 사 먹는 시간이나 집에서 휘리릭 재료를 가볍게 익혀 먹는 시간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을 없애 아낀 체력으로 더 많은 일들을 기획하고, 틈틈이 운동을 다녀올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방에서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내가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이 엉키고 쌓여 존재감을 키워갔다. 무언가 해보려 하면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고, 답답했다. 대청소를 하려고 했던 명절 연휴 직전, 갈비뼈가 다치는 바람에 그마저도 한 달의 유예를 만들었다. 그렇게 벌써 입춘을 맞이했고, 3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거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었구나. 어쩌면 1년 간 혼자서기, 제대로 독립하는 것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생활로도, 공간으로도 연습해 오며 차차 만들어온 것 같다.
잃어버린 거라 생각해 울고만 싶었던 하늘색 노트. 5년 정도 동안의 독서 노트와 원고를 손글씨로 써둔 소중한 노트였다. 대청소를 하지 않았으면 찾지 못했을 테다. 처분해 버린 차 안에 있었던 건지, 이사오기 전 집에 두고 온 건지 싶어 너무 슬펐다. 찾는 걸 포기해야 하나 내려놓고 지냈는데, 대청소를 하다가 노트를 찾았다. 방 안의 가구들의 구조를 뒤집어엎듯이 바꿨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다. 대청소만 할까, 구조 변경까지 다 할까? 고민하다가 구조까지 바꾸기로 결정하고 첫 번째 순서로 침대 옮기기로 정했는데, 침대를 옮겨 드러난 바닥에 노트가 있었다. 어디에 간 건지 헤매다 전에 만나던 이에게 느닷없이 연락해 내 노트 거기 있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정말 극적 안심 엔딩이었다. 이제 사라진 신앙심도 잠시 살아나서 오 주여!!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 행복해!'를 연신 외쳤다.
그래서 쓸 수 있었다. 길을 잃었던 시간, 비워내는 것에 슬퍼하지 않게 도와준 내가 쓴 글들. 다시 찾아내어 읽고 다시 쓸 수 있었다. 포항으로 내려갔던 날들. 쓰는 나에게만 집중하기로 한 시간들, 일주일간의 포항에서의 시간을, 그 시간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다시 길어 올릴 수 있게 됐다.
다시 찾은 이야기 중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건 단연 접고 접어 가벼워진 삶에 관한 이야기였으면 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쓰고 짓던 2023년 4월엔 내가 지금 이런 삶을 살게 될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간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때 써둔 글은 지금의 나에게 너무나 큰 치료제가, 혹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아쳅토를 만들 때, 공간을 운영하는 방향이자 기준으로 세웠던 여덟 글자다. 김유신이 삼국사기에 남긴 문장이기도 하다. 그가 백제의 궁이 자연과 어우러지던 모습을 보고 ‘검이불루儉而不陋’라 감탄한 풍경은 결코 진귀한 소재를 가득 채우고 거대한 외형으로 만든 풍요로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장식 요소를 과감히 줄여 단아한 궁궐과, 뒤를 포근히 받쳐주는 자연이 어우러지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신중하게 고르고 세운 궁의 단아한 곡선과 색과 면이 더욱 아름다웠던 이유는 산과 너른 하늘 속 빈 곳들의 지형의 까지 품은 호흡이 하나의 화폭 같은 조화를 이루도록 절제된 설계와 건축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 대해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졌다. 지금의 삶의 방향 전환과도 깊게 닿아있었기 때문이다.
누추함과 검소함의 경계는 어떤 것이 결정할까? 지킬 것에 집중하는 삶이다. 소중한 것을 더 확고히 지키는 삶이다. 누추함은 어떨 때 생겨날까? 아마도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집중할 수 없을 때 누추해질 것이다.
그런데 누추한 것은 나쁜가? 왜 누추해지면 안 되나?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웠을까? 나는 누추해지는 삶, 가난하고 헐벗은 삶을 두려워한 걸까? 가난해지고 내려놓은 삶을 우습게 여길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웠던 걸까? 엄밀히 들여다볼 문제다. 내가 갖고 싶었던 건 물건인가, 사람들의 인정과 부러움인가? 자세히 더 깊이 파고들어 봐야 하는 질문이다.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무엇인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계속해서 다시 물어보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계속 아쳅토라는 살롱을 가꾸는 정원사로, 책방지기로, 글방지기로 살고 싶다. 그것들을 다 하면서 살자면 검소한 삶은 나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대청소를 시작으로 접고 접는 생활에 검이불루를 적용해 보기로 했다.
시작은 방에만 누우면 시야를 어지럽히던 옷부터. 일 년 동안, 아니 한 계절 동안 입는 옷은 6벌-8벌 남짓이다. 바지 세 가지 정도, 상의 다섯 가지 정도. 거기에 겨울이면 아우터 두세 가지. 가을과 겨울 통틀어 열 벌 남짓한 수의 옷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왜? 봤더니 입는 옷, 손이 자주 가는 옷만 계속 입게 된다. 지내보면 내 체형과 피부색에 어울리면서, 내 생활 방식에 맞는 옷에 손이 계속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 그 옷을 피부처럼 걸쳐 입고 지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이 있겠지만, 이제는 계속해서 유행 따라 계속 새로운 옷을 시도하고 모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20대 때 충분히 많은 모험과 도전을 하고, 실패와 성공을 통해 찾아간 스타일이라 그럴 것이다. 그렇게 옷도 일 년에 두세 벌 구매할까 말까 한다. 그 정도로 구매력이 줄었다. 내 몸을 힘들게 하는 옷과 신발은 더 이상 곁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빛내 줄 옷만 남긴다. 옷이 예뻐 보이고 옷이 주인공이 되는 옷은 더 이상 내 옷장에 두지 않는다. 나를 위한 옷만 남긴다.
책도 그렇다. 전에는 구매하고 싶으면 비교적 망설이지 않고 사버리는 편이었다. 한 주에 두세 권을 거뜬히 샀다. 그런데 이제는 충분히 장바구니에서 숙성 기간을 거친다. 그리곤 도서관에서나 전자책으로나 충분히 읽어보고 소장 여부를 결정한다. 내가 들인 물건에 대한 책임감을 깊이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한번 집이나 공간에 들인 물건을 버리는 것도 쉬웠다. 쉽게 사고 쉽게 버렸다. 대청소를 하더라도 큰 용량의 쓰레기봉투만 준비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이사하면서 쓰지 않는 카펫 세 개를 아직도 돌돌 말아둔 상태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세워두고 있다. 어딘가에 기부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이 거대한 친구들이 쓰레기가 아니라 쓰임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만큼 물건을 버리는 것에도 큰 책임을 느끼게 됐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들이는 것 자체에 신중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음식을 몸에 담는 일에도 마찬가지가 됐다. 집을 마구잡이로 채우면 버겁고 더러워지듯이, 내 몸에도 마구잡이로 욕망대로 양껏 음식을 채우는 일을 경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의식주의 영역을 조금 가볍게 하기로 했다고 해서 내가 미니멀리스트를 향해 간다라고 할 순 없다. 분명히 차이가 있다. 나는 아직도 욕망덩어리고, 그 욕망 중 많은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수집욕의 사람이다. 갖고 싶은 것도, 읽어보고 싶은 책도, 경험하고 싶은 것도 아주 많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선별해서 쥐어보겠다는 기준이 생긴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줄이기 위한 것, 간소화하는 것만이 목표이자 목적은 아니다. 비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순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도리어 갖고 싶은 것,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들을 아주 어렵사리 고르고 골라,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만큼만, 정성껏 지킬 수 있는 만큼만 곁에 두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쁨을 주지 않고, 충분한 행복을 주지 않는 것은 과감히 비워가며, 거절해 나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거절과 내려놓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내 삶의 시간에도 검이불루가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루를 가득 채워내려고 기를 써왔다. 그동안 아낀답시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낸답시고, 이것저것 너무 많은 것을 짧은 시간 내에 하려고 하는 모습들 속에서 검소함이 아닌 누추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작 소중한 건강이든 일의 깊이를 지키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계획을 다 마치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던 날들은 안쓰럽고 빈곤한 풍경이었다. 그런 분주함이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실제로 어떤 일과 다른 일의 전환을 위해 전환 에너지가 크게 쓰인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전환의 지점이, 연결점이 잦아질수록 시간을 몰입해서 보낼 수 있는 물리적인 범위도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남루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누추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너덜하게 쪼개어 보내는 일상은 자연스레 산만한 일터의 풍경을 만들기 십상이다. 관심사가 풍부하고, 살피는 풍경이 넓은 것과 일에 깊이를 더하며 성과를 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일을 산만하고 급하게 많이 처리하려는 방식은 회사를 다니면서 생긴 듯하다. 10년간 대규모 예산과 인력으로 일하는 기업형 브랜드의 마케터 체질을 못 버리고 빠른 속도와 규모로 일을 벌이려 했다. 지금 내 상황과 일하며 살고자 하는 방향이 바뀌었는데, 일 하는 방식은 거대 규모의 것으로 유지하고 있었으니, 힘들고 벅찰 수밖에. 내 삶의 풍경과 지형도를 다시 큰 그림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내가 어떤 배경 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한다. 삶과 일을 다시 촘촘히 설계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올 해의 시작은 그렇게 목표를 잡았다. 3개월 정도, 길면 6개월 정도를 내 일과 삶을 다시 설계하는 시간으로 갖기로 한 것이다. 잠을 자고 먹고 쉬는 내 개인 공간의 재구성도 같은 이유로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쥐고, 지키며 어떤 것을 기둥 삼아 세우고 올려 갈 것인지, 어떤 허물과 장식을 내려놓을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의심하게 된다.
나는 내 분주함을 핑계 삼아 일의 성취를 놓쳐온 것만 같다. 효율과 비법을 찾느라, 더 나은 방법을 찾는다며 정면으로 부딪혀 매달릴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빈약하게 흐리멍덩한 에너지로 보낸 시간은 그럭저럭 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런저런 싶은 결과물이라도 부지런히 이어간다면 조금씩의 개선은 있었을 터인데, 그마저도 충분히 끈기 있게 이어졌는가 하면 여전히 이리저리 흩어진 일의 내용들이 방황하듯 흔들리고 있는 게 보여 씁쓸할 뿐이다.
조금은 더 오롯이 충만하게 '있음'을 누리며 살고 싶다. 밥 한 끼를 먹더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먹고 싶다. 이 재료들이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기도, 작아도 안전한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상황에 고마워하면서 말이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이왕이면 풍랑에도 폭우에도, 산불에도, 기후위기에도 무너지지 않을 집을 짓고 싶은데. 일도 삶도 건강하게 세워가고 싶다. 흔들릴 순 있어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 집이면 좋겠다. 비가 들이치더라도, 비가 그치고 볕이 들면 금세 보송하게 마르는 집이면 좋겠다. 바람이 잘 들려면 공간에도 여백이 필요할 테다. 내가 사랑하는 나무도, 책도 환기가 중요하니까, 건강하게 생장하려면 빛과 바람이 드는 공간으로 세워가야겠지. 나의 일과 삶도 그렇게 빛과 바람이 충분히 드나드는 여백이 있는 조화로운 것으로 세워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