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불치 華而不侈 |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다운 삶, 그리고 일
2025. 3. 6
화려하지만 사치롭지 않다.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다운 삶
영화 「서브스턴스」를 두 번 봤다. 며칠이 지나도 여운이 가시지 않고, 도리어 짙어지기만 했다.
‘더 나은 나는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며 생겨났지만, 생각할수록 엉키기만 하고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한번 더 감상하면 실마리에 가까이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 영화는 바디 블러디 스릴러(Body bloody Thriller), 혹은 바디 호러(Body Horror)라는 장르를 표명한다. 말 그대로 선혈이 낭자하는, 보기 괴로울 정도로 신체를 해치는 장면들이 정신과 육체를 모두 자극하는 스릴러 영화다. 대중에게 사랑받던 탑급 여배우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하다 못해 그마저 잘리며 뒷방 노인네로 취급받기 시작하자 ‘더 나은 나’를 만들어 살아보려는 비밀스런 도전을 감행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살아왔던 삶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스포트라이트로, 화려한 집과 옷으로, 벌어둔 돈과 명예로 이루고 싶은 것은 사실 사랑이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그리웠다. 사람들의 관심이 과거형이 되는 것에 절망을 느낀다. 계속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자신을 해치는 방법으로 그 욕망은 흐른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서도 강제 하차당한 엘리자베스. 비밀리에 집으로 배송 온 주사, '더 나은 나를 만들어준다'는 서브스턴스를 자신의 몸에 주입한다. 신비한 연두색 액체로 탄생한 새로운 몸 ‘수’와 일주일씩 삶을 번갈아가며 살아간다. 본체인 자신의 골수를 안정제로 쓰며 ‘수’와 위태롭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생활을 이어간다. 몸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점점 ‘서로’를 원망하기 시작하고, 위협감을 느껴 서로의 존재를 지우려고 시도한다. 그만큼 이질적인 삶이지만 실은 ‘둘은 하나’라고 계속 영화는 말한다. 원래의 그녀도, 더 나은 버전의 그녀도 방송이 끝날 때마다 말하던 문장이 머릿속에 계속 떠다닌다.
‘그동안 자신을 잘 보살펴 주세요.’
아름다운 것은 얼마나 삶에 이로운가. 무용해보이는 이 가치가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 그런데 저마다 각색으로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점점 사회는 뾰족한 방향을 제시한다. 영화 속 아름다움은 오직 ‘젊고 생기있는 밝은 여성’을 향한다. 젊음을 잃은 여성은 껍질만 남겨진 먹다 만 새우와 같이 묘사된다. 마치 그 뾰족한 화살표가 향한 곳의 반짝임만이 진짜라는 듯이. 그 반짝임은 충분히 화려하다. 하지만 그것은 괴이하게도 거꾸로 향한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방향으로 향한다. 늙어가는 것을 혐오한다. 익어가는 것은 존중하지 않는다. 그 화려한 반짝임의 삶을 위해 모두가 자신을 해치는줄도 모르고 거꾸로 자신의 생명을 연료삼아 질주한다.
아쳅토도 아름다움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제동장치를 걸어 두었다. 하나의 주술같은 문장으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아쳅토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지침이 되어주는 이 문장에서 ‘화이불치’는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실은 이 문장이 쓰여진 배경은 우리같은 열악한 자영업자를 위해 쓰여진 문장은 아니다. 사치스러운 삶이 덕이되지 않았던 백제시대, 궁궐의 사람들에게 했던 독려였다. 나의 일터 아쳅토가 왕궁도 아니고 애초에 수린과 나는 사치를 부릴 여력도 없는데 뭔 사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을 수 있다. 소자본 소규모 공간에서 어떤 사치를 부리겠는가. 하지만 있다. 분명 있다. 자신의 소화치를 넘어 스스로를 해칠 정도로 사치하며 아름다움을 쫓는 이들이. 그리고 그랬던 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리고 여건이 된다고 마구 사치하는 것은 어떤가? 괜찮은가? 주변에 주는 위화감, 그리고 무력감과 박탈감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울타리를 쳐두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가 실현하려는 아름다움에 대한 도전장이기도 했다. 검소하기만 하면 아름다울 수 없다. 자연을 생각하고, 비거니즘을 실천한다고 하면 왠지 초라하고 누추한 삶을 살고,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을 것처럼 생각하는 인식도 엎어버리고 싶었다. 자연과 나를 모두 사랑하는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바라는 사치스럽지 않은 화려한 아름다움은 무엇이냐고 물어올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해도 궁금했다. 어떻게 표현해나갈 수 있을까. 우선 ‘화려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화려한 아름다움이란
첫 번째 의미는 이거다.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답다.’ 헌데 두번째 의미는 이러하다. '어떤 일이나 생활 따위가 보통 사람들이 누리기 어려울 만큼 대단하거나 사치스럽다.’ 두 의미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실제로 활용하는 어감으로는 후자에 가깝게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헌데 왜 계속 화려한 아름다움을 놓칠 수 없다고 붙잡는 것일까. 환하게 빛나는 것. 곱고 아름다운 것. 고운 것은 뭘까? ‘곱다’는 말의 뜻도 찾아본다. ‘모양, 생김새, 행동거지 따위가 산뜻하고 아름답다.’ ‘색깔이 밝고 산뜻하여 보기 좋은 상태에 있다.’ ‘소리가 듣기에 맑고 부드럽다.' ‘만져보는 느낌이 거칠지 아니하고 보드랍다.’ ‘가루나 알갱이 따위가 아주 잘다.’ ‘상냥하고 순하다.’ 상냥하고 순한 이미지를 화려함에서 묘사하는 가치는 아닐 것이다. 모양과 생김새, 행동거지 따위가 산뜻하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쳅토는, 정확히 말하자면 아쳅토를 운영하는 수린과 나는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것을 할 때 아름다운 순간을 느끼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아름다움이 환하게 빛나는 지점. 그것은 결코 외모에서만 풍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빛이다. 그 속에서부터 비추어나오는 빛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린 삶에서 많이 느낀다. 이것은 건강의 요소일수도 있고, 충족한 상태에서 오는 풍요로움일수도 있다. 사치를 부릴 수 없는 형편이 싫은 것도 있지만, 화려하게 사치스런 외형을 만들기 위해 고객에게 어떤 거품과 불필요한 비용이 덧입혀지는지 숱하게 봐온 과정에서 지친 것도 있다. 고객에게 그런 불필요한 포장이 덧입혀지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가가치 라는 명목 하에 노동 착취를 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그늘을 만들어내는지 계속 그 속에서 겪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드시 갖춰나가야 하는 품질과 형식이 있을테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등자와 운영자를 위한 삯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일상에 더 많이 누렸으면 좋겠다. 어떻게 가능할까? 계속 고민해가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가 제공하는 아름다운 가치가 사치스럽지 않길 원한다. 그 묘한 선을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치스럽지 않기 위해.
만족하는 마음, 필요할테다. 그런데 그런 막연한 만족에 대한 이야기 말고, 조금은 더 깊이 들어간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아름다움이 더 비싸고 사치스러워지는 이유는 내면의 건강하고 단단한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 밖의 요란한 소리와 값비싼 외장재만 겹쳐 쌓고 있기 때문이다. 겉치장이 과해질수록, 쉽사리 무너진다. 구조와 뼈대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나의 일상이 그래왔다. 가장 건강하지 않던 생활을 살아낼 때, 가장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속에서 곪는 것들을 겉의 장식으로 가리고 꾸미며 지냈던 날들이다. 옷도 자주 샀다. 신발도 장신구도 자주 샀다. 금새 질렸고, 그렇게 많이 자주 사는데도 이상하게 지금처럼 매일 손이가는 옷은 잘 없었던듯 하다. 주변에 나눔 할때도 있었지만 주로 쉽게 사고 쉽게 버렸다.
안팎의 균형이 뒤집히면, 넘어지기 마련이다. 정성껏 쌓은 것도 그저 그런 비바람 한번에 휩쓸려 갈수도 있다. 중심도, 기둥도 없이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고유한 멋과 빛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내 드러내면 쉬울 일을, 기존의 빛을 가리고 새로운 옷과 껍데기를 굳이 두껍고, 무겁게 맞지도 않는데 마구잡이로 입히고 씌워 놓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예능에서, 브랜드 광고에서, 내가 보는 아이돌의 모습에서,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 나은 나의 환상을 쫓는다. 사랑받고 싶고, 같은 것을 걸친다는 소속감도 클 것이다. 그런 허상 속 세상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그렇다 보니 적절히 안전해 보이는, 많은 사람이 쉬이 인정해줄만한 외형을 입는다.
옷과 장신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집을 살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여행을 갈 때도 요새는 그렇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찾아 입는다. 말 그대로 남의 옷을 입는 겪이다. 그것이 때로운 거추장스러운 껍데기가 되어버리거나 무거운 짐이 된다 할지라도, 이고지고 살아낸다. 그 껍데기와 무거운 짐을 위해 많은 비용을 계속해서 새롭게 써야 한다. 그 비용을 위해 또 고된 노동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계속 새로운 외형을 입으려면 기존의 사용을 다한 껍데기는 버려져야 한다. 그런 슬픈 생태계 구조가 탄생한다.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겹칠수도, 혹은 욕심껏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껏 다 안고 겹치고 그득그득 쌓아낼수도 있다. 그것이 서브스턴스의 영화 속 괴물이 되어버린 변형체, ‘몬스터엘리자베스수’와 무엇이 다른가. 아니, 그를 변형체라 할 수 있는가? 답할 수 없다.
화이불치하게 일하는
아쳅토 살롱의 풍경.
나는 수린에게 마음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가꿀 책을 건네고, 생각해볼 질문과 이야기를 건넨다. 수린은 나에게 외모의 아름다움도 함께 건강하게 가꾸게 돕는다. 특히 헤어. 머리카락을 빚어내는 일은 얼마나 가치로운가. 끝도 없이 자라는 것이 머리카락이다. 가꿈의 최전선이다. 머리 가꿈.. 사람마다 머리카락이 달려있고, 계속해서 죽을때까지 자라나니까. 그것은 필수의 영역이다. 그리고 잘 가꾸었을 때 어떤 화려한 메이크업이나 장신구보다 더 그 사람의 얼굴빛을 살려주는 것이 헤어스타일이다. 보통 미용실에서 상담에 그렇게 긴 시간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아쳅토는 헤어살롱을 1:1 예약제로 운영하기 때문에, 방문하는 손님 개개인에 맞춘 가꿈을 제안한다. 우리의 사려깊고 예리한 눈을 지니고, 섬세한 손길을 갖춘 헤어살롱지기 수린은 방문한 머릿결과 두피의 건강 상태, 하는 일과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 등을 묻고 듣는다. 그렇게 충분히 사전 대화를 나눈 후에 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또 바라는 지점과 가꿈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건강한 변화의 교차점을 찾아내어 가꾸어준다.
그저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유한 빛이 있다. 나만이 지닌 빛. 그것에 집중하자 말하고 싶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단일한 유행과 잠시의 반짝임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그 움직임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자신의 속도와 방법으로 고유한 빛을 환하게 비추어가보자고 제안한다. 그럴때 사람은 가장 아름답다. 곱고 환하게 빛난다. 그 숨은 빛을 발견하고, 환하게 비추어갈 수 있게 가꾸어주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아쳅토가 걸어가고싶은 방향. 그리고 움직이는 동력. 사람들의 고유한 아름다움. 본연의 아름다움. 그것을 지키고 키우고, 그렇게 함께 생장해나가자는 것. 그 과정이 화려하지만 사치롭지 않은 삶으로 드러나길 바란다. 우리의 아름다움의 가치를 우리가 먼저 실현할 수 있어야 자연스럽게 동화될테지. 그래서 더욱 우린 내면의 건강과 빛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며 살핀다. 마음의 빛이 시들진 않았는지. 그것은 책과 글쓰기로 다진다. 또 출산 휴가가 끝나가며 육아와 틈틈히 하는 일로 바쁜 수린에게도 마음에 빛을 간직했던 작가들의 전시나 회고록을 함께 감상하러 가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또 그런 밝고 환한 길로 안내하는 글을 함께 읽는다. 서로에게 읽어주고 보내줄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지닌 마음의 빛을 지켜나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