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병 '이석증' 이야기
2025. 3. 13
개운하게 운동을 마치고 매트에 누워 쿨다운을 시작하는데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돌리고 있는데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누운 채로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 익숙한 이 회전판 위의 기분. 이석증이 도졌다.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1월에 다시 찾아왔었다. 그때 나는 유독 무리했고, 계속 무리해야 하는 중이었다. 그때 크게 이틀 내내 어지럼증을 겪고 나서 신경 쓰며 증상이 잠잠해졌다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석증은 사실 나의 반려병이다. 20대 중반에 처음 찾아왔고, 지금도 이렇게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오며 함께하고 있으니 이제 남은 삶도 함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생을 함께할 것이라고 해서, 익숙해졌다고 해서 병의 증상에 내 감각도 차츰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뒤집히기 시작할 때 이 무너지는 기분은 어찌할 수가 없다.
왜 하필.
왜 이럴 때
왜 이렇게 크게
아-
아아 -
누가 나 좀 잡아주세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이 고독한 병. 상처 하나 없고, 생명에 지장도 없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지게 만드는 이 어지럼증. 하던 일을 모두 의미 없게 만들어버리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든 그만 가고 싶어 지게 만드는 병.
이 망할 놈의 기울어진 길바닥. 쏟아져내리는 하늘. 바닥은 굽어져 올라오네, 젠장. 분명 앞으로 걷고 있지만 조금씩 왼쪽이나 오른쪽 아래로 향하게 되는 걸음걸이. 아 보도블록이 자꾸만 구불거리잖아. 괜찮은 채 하고, 공중에 난간이라도 잡듯이 손을 양쪽으로 뻗고, 하늘이 에스자로 휘어지고 물결치는 것을 겨우겨우 외면하려 노력하면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망원역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철을 탄 이유는 다음 주면 백일을 맞이하는 조카 ‘오서로’의 선물로 주려고 산 그림책 「마지막 거인」을 장충동에 가서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지금 이제 미소를 짓기 시작한, 뒤집기도 옹알이도 아직인 서로에게 이런 무거운 동화가 무슨 소용이 있냐 싶을 정도로 어른을 위한 동화 같아서 좀 스스로도 어이가 없지만,, 문해력과 세상을 보는 눈만큼은 책임져주는 고모가 되고 싶어서,, 여하튼 그 책을 구매한 출판사로 책을 직접 받으러 갔다. 기구한 사연까지는 아니고, 현장에서 구매했지만 재고가 없어 택배로 받았어도 되지만 이 책의 마케팅 담당자이자 현장 판매자가 무려 아쳅토 책 친구 윤우님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도 볼 겸 직접 갔다. 실은 아쳅토로 가져다주신다고 하셔서 기다렸지만 그녀의 야근으로 제 때 받지 못했고, 이번 주에 서로의 백일을 축하하는 가족 식사가 있기 때문에 늦어도 오늘 중에는 받아와야 했다. 그래서 한 시 반까지 맞춰 가려고 부지런히 12시 운동을 간 건데, 저녁에 북살롱이 있는 수요일인데, 오전부터 머리가 멍하고, 피곤함이 컸다. 저녁까지 에너지를 지키고 싶어서 나가기 직전에 10분 쪽잠도 잤지만 소용없었나 보다. 마지막에 낙타자세로 척추를 푸는데 척추를 말았다 펼 때마다 슬금슬금 땅이 울렁이기 시작하더니 눕자마자 뒤집히기 시작한 것이다. 운동은 재밌었지만 유독 힘들었다. 올해 한 운동 중에 가장 힘들었다. 운동이 너무 격했던 걸까? 사실 안다. 운동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침부터, 아니 월요일부터 몸이 안 좋았다는 것을.
월요일을 떠올리니, 월요일 밤 심야북살롱 독서모임 때 책 친구 이도님이 읽어 준 「끈기의 말들」이 생각났다.
백현진의 인터뷰 기사를 가끔 읽는다.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그는 '개장수, 사채업자, 재벌 2세, 지방대 교수를 종종 연기하면서 소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한 가지만으로도 탈진하기 쉬운 현대 사회에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고르게 발현해 나가는 보기 드문 예술가다. 그는 '외부의 의뢰 없이도 자기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예술가'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지도 모를 삶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든든한 선배가 생긴 기분이었다. 타인의 무관심 속에서도 자기 일을 오래 할 사람.
목표가 뭐냐는 질문에 그는 '절대 무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라고 답한다. 작품의 완성도에만 집착하며 자신을 갉아먹고 타인을 괴롭히면서 고통스럽게 해 왔다면 20년 넘도록 묵묵히 자기 작업을 이어 나가기란 불가능했으리라.
그는 '무리하지 않고 즐겁게 만든 음악을 나중에 더 자주 듣게 된다'고도했다. 나도 내가 만든 책을 종종 다시 읽는다. 어떤 작가는 쓰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 책이 완성된 뒤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는데 나는 반대다. 그 책을 쓰고 만드는 동안 좋았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자꾸만 읽는다. 그 기분을 다시 불러와 다음 책을 만든다.
강민선 「끈기의 말들」 p.17
강민선 작가는, 또 작가가 소개한 백현진이라는 사람은 오래 하고 싶은 것일수록 너무 무리하며 해내지 않기를 권하던데, 나는 늘 무리하는 것 같다. 아니 무리하는 상태로 계속하는 것 같다. 무리하는 끈기.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지속하는 사람. 그게 나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무언가를 할 때 무모했고, 무리했다. 늘 초과하는 것들 투성이었다. 놀 때도, 사람을 좋아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좀처럼 자제를 못했다. 그렇구나. 나는 자제력이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구나. 좋아하는 것을 적당히 하는 것을 못하는 무모한 사람. 이런 무모한 성향이 나의 강점이면서, 그러면서 나를 갉아먹는다. 이석증도 참담할 정도로 무리하며 남의 지시로 일을 하던 시절에 처음 얻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또 이렇게 무리한다.
앞으론 밤 열한 시가 되면 잠에 들자고 다짐했던 월요일, 바로 이틀 전 간 정기 검사 결과일이었다. 6개월마다 추적관찰하던 간 초음파와 혈액검사 결과를 들으러 이대서울병원에 다녀왔다. 다른 수치는 대부분 다 좋아졌는데, B형 간염 바이러스 수치가 60배 이상 늘었다고, 그래서 간세포가 상하기 시작해 간수치도 조금 올랐다고 했다. 3개월로 관찰 시기를 당기고, 이후에도 수치가 잡히지 않으면 약을 써야 한다고 했다. 충격, 슬픔. 이렇게까지 수치가 오른 적은 없었는데, 왜 이렇게 까지 된 걸지 여쭤보니, 모든 원인을 알 순 없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도 대표적인 이유라고 했다. 면역력.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겨울을 났는데 왜. 면역이라는 단어를 되뇌다 수면, 잠이 생각났다. 아이폰에 기록된 수면 시간을 보니 2~3월 평균 수면 시간은 5시간 9분이 떴다. 문제는 잠이지 않을까 싶었다.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선포와 함께 시작 됐던 극한의 수면 부족으로 보낸 연말연시. 거기에 무리하는 일상이 더해져 평균 수면 시간을 깎아먹던 날들이 떠올랐다. 앞으론, 아니 최소 수치가 잡힐 때까지만이라도 기필코 열한 시에 잠에 들겠다고 결심했다. 7시가 넘으면 눈이 저절로 떠지곤 하니까 여덟 시간은 자려면 최소 11시엔 자야 했다.
그렇게 치밀하게 수면 시간을 개선해 보자 다짐하고 계산해 놓고는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열두 시 반에서 한시 사이에 잠들었다. 7시간도 채 못 잔 것이다. 8시간을 잘 깊게 자보겠다고 결심하지만, 도무지 잘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일찍 잠에 드는 게 힘들까. 어려울까. 좋은 것을 적당히 하고 그치는 게 난 왜 이리도 힘이 든 걸까.
스스로가 답답하고 안쓰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눈물도 나지 않고, 방법도 모르겠다. 아니 방법은 알지만, 밤이 되어서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를 자제시킬 자신이 없다. 책 읽기도, 끄적이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밤이 늦을 때까지 대화를 이어가는 일도, 10시까지만 하고 멈출 수 있을까? 자신이 있다가도 밤이 되면 나는 사랑하는 일을 하려는 나와 타협한다. 무리하게 사랑하는 나에게 모든 걸 맡긴다. 아니 무리하는 내가 모든 것을 이긴다. 사랑이 이긴 건가? 격하게 해석하자면 그렇다. 아니, 사랑이 해친다.라고 해야 할까.
사랑이 해친다.
나에게 사랑은 무리다.
책 친구 이도님이 「끈기의 말들」을 읽으며 무리하지 않고 오늘을 즐겁게 사는 삶을 이야기할 때, 나는 부서지고,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야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사랑」을 읽었다. 끝없는 상실과 망각 속에서 헤매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다. 책 전체가 한 편의 긴 - 시와 같아서, 읽는 사람도 길을 헤매고 함께 방황하는 그런 작품. 그리 어렵고 난해한 자신의 글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저 사랑해 달라고 말한 뒤라스. 그런 그녀 또한 평생 신경증을 앓고 살았다고 한다. 저마다 삶을 초과한 고통을 안고 산다는 말, 그러한 자신을 묶고 누르는 신경증을 가지지 않은 이가 어디 있냐고 묻던 옮긴이의 덧말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 삶에 주어진 에너지와 시간과 여지를 넘어선 사랑으로 늘 내일(來日)을 갉아먹으며 산다. 그렇다고 무리하는 만큼 많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마구 사랑하고 무모하게 누릴 뿐이다. 만끽할 뿐이다. 이런 내가 답답해서 눈물이 난다. (정확히 말하면 눈물이 나는 기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나 흐르진 않았다) 이렇게 답답하고 속상해하고 또 나는 반복할 것을 안다. 정말 이렇게까지 아파보고 이렇게까지 망가져 보고도 나는 고치지 못한다. 나의 악습관. 마약이 왜 필요한가. 술이 왜 필요한가. 이미 충분히 중독되어 있는걸. 이미 자제력을 잃은 삶을 살고 있는 걸.
드디어 책방 사업자를 추가했다.
이제 아쳅토에서 책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기쁘다.
그리고 나는 오늘 슬프다.
책 친구들이 두 명 늘었다.
신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무력하다.
단편 소설을 써낼 갈피를 잡았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기대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만 살고만 싶다.
한강 작가의「작별」 속 눈사람이 되어버린 주인공이 삶과 작별을 준비하며, 홀가분하게 녹아 없어질 결심을 하던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저 간에 바이러스가 십육만 개 정도 설치면서 간세포를 조금씩 파괴하고 있을 뿐이고(어차피 사람의 모든 세포는 만들어지고 곧 죽기 시작한다), 어지럼증 조금 생겼을 뿐인데(어지럼증은 심지어 세포 하나 손상시키지 않는다) 너무 극단적인 게 아닌가 싶다. 엄살이 좀 지나치게 심한 게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오는 대학 동기 언니의 연락에도 기쁘게 답을 하기 힘든 걸 보면 조금은 무거운 응석인 듯싶다. 평소와 같으면 반가운 이의 인사에 즉답으로 화답했을 텐데, 두 시간이 지나도 메시지를 읽지도, 답변하지도 못하고 있다. 도무지 잘 지내고 있냐는 말에 그렇다고는 못 하겠다. 일단 언니는 내 이혼 소식부터도 모른다. “아직 신혼집 군포 어디에 살고 있지?” 까지 읽었다 … 어디서부터 내 소식을 전해야 할지 아득하다. 더 어지러워졌다.
손 발이 멀쩡하게 움직이고, 나는 아직도 걷고 뛸 수 있고, 오늘 버피테스트를 씩씩하게 잘 해냈고, 박스 점프도 무리 없이 했는데, 몸엔 힘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다. 눈사람이 아니라 물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어느 때보다 수치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서 힘이 빠진 걸까, 어느 때보다 수치가 좋지 않아서 힘이 정말 없는 상태인 걸까, 어지럼증이 발현되어서 나는 모든 걸 그만하고 싶어 진 걸까, 어지러워서 어떤 것도 하기 힘든 상태인 걸까, 알 수가 없다. 구분을 해보려 해도 이것과 저것 사이엔 물이 흐르고, 그 물은 묽고 되직하며, 덕분에 내 시야는 계속 흐리멍덩하다.
보통은 이쯤 밖으로 나와 걷고, 햇살을 보면,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을 잠시라도 만나면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오늘은 좋아지지 않는다. 이 기분이 계속 세 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어지럼증은 진정 됐고, 더 이상 글을 쓰고 있는 카페 테이블도, 조명이 가득 달린 천장도 일렁이지 않는다. 어쩌면 아닌 척했지만, 월요일 오후부터 지금까지 72시간째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널브러져 있던 걸까. 핑계김에 오늘로 예정되어 있던 산부인과 정기검진 진료는 4월로 한번 더 미뤘다. 또 한 번 나쁜 소식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건지, 몸과 마음에 너무 힘이 없는 건 지 모르겠다. 어쨌든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장충동에서 전철 한번 갈아타고 50분이면 도착하는 발산역에 가는 게 만리길을 걸어야 하는 탐험대의 막막한 기분과 같았다. 가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까딱 빙글빙글 돌다가, 어딘가 잘못된 곳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그래서 다신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시작할 것만 같은 기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썼던 루이스 캐럴도 어지럼증을 앓았다고 한다.
아직 제대로 원서를 읽어본 적 없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나는 어디서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세상이 구부러지고, 왜곡되는 장면이 그가 실제 겪었던 어지럼증으로 인한 경험으로 그려낸 세계라고. 갑자기 그 이상한 나라가 너무 슬프고 쓸쓸한 곳이 되어버렸다. 며칠 전 롱블랙*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칼럼을 읽었을 때는 가볍게 읽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을 하나씩의 페르소나로 지니고 다니며, 상황에 맞게 대처해서 꺼내 쓰라는 아주 자기 계발서다운 지침이었다. 읽는데 웬걸. 하나도 도움이 된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말이야 쉽지’라는 생각뿐이었다. 한데 루이스 캐럴이 이 작품을 쓸 때도 나와 같이 세상이 빙빙 돌고 서 있는 땅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저 아득하게 멀리, 긴 시간을 건너 손을 잡은 기분이 들 뿐이었다.
✴︎롱블랙
비즈니스 콘텐츠 구독 플랫폼이다. 하루 하나의 ‘노트’라는 명칭의 칼럼을 발행하는데, 인터뷰가 주를 이룬다. 발행일 기준 하루 안에 열람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열람 시간이 지난 이후엔 유료 구매 샷을 소진하면 열람할 수 있다.
어지럼증은 참으로 고독하다. B형 간염보다 훨씬 슬프다. 차라리 간이 상해 가고 있다는 소식이 덜 힘들다. 약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까. 겉으로 상한 티도 나니까. 완치는 아니더라도 약물 치료로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순 있으니까. 치료법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석증은 한 번 발현되면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한다. 완치도, 약도, 치료법도 없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반려병이라고 했지만, 진심으로 한 얘기다. 이미 내 삶에 찾아온 이 어지럼증을 나는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평온한 날들, 그러니까 땅과 하늘이 제자리에 있는 날들을 지낼 때엔 존재조차 잊고 지내던 이 병은 불현듯 갑자기 벼락처럼 찾아온다. 과장이 아니다. 정말 갑자기 내 세상이 느닷없이 뒤집힌다. 그때 내 뒤집어지는 세상에서 붙잡을 손은 아무것도 없다.
아까 TRX로우 동작을 하며 로프를 잡고 누워서 줄을 당기는 동작을 할 때, 수연님이 절벽 끝에, 혹은 난간에 매달렸을 때 살아남아야 하는 심정으로 붙들고 견뎌보라고 했는데, 그런 줄이라도 있으면 견디는 연습이라도 할 텐데, 갑자기 찾아오는 벼락같은 어지럼증엔 동아줄이 없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세상은 뒤집힌다. 어떨 땐 앞에 보이는 세상이 뒤로 뒤집히고, 어떨 땐 하늘이 바닥으로 꺼진다. 옆으로 뒤집힐 땐 도무지 어딜 잡아도 두려움이 가시질 않는다.
평소에 사람에게도, 어두운 밤길에게도, 동물이나 벌레에게도, 바닷물에서 수영을 할 때에도, 급경사인 놀이기구를 탈 때에도, 귀신에도 무서움을 잘 느끼지 않는데, 불현듯 어지럼증이 들이닥칠 때 나는 가장 두렵다. 실제 세상이 돌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 세상이 돌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 하는 감각이라서, 그냥 눈에 보이는 시야만 도는 게 아니라 중력이 함께 뒤집히는 기분이다. 그래서 상황과 내가 밟은 땅의 현실 구분을 할 수 없다. 그저 뭐라도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을 뿐이다. 그렇다고 멈추진 않는다. 한번 격하게 돌기 시작한 세상은 최소 여덟 바퀴에서 열 바퀴 정도 돈다. 일렁이며 속도 계속 뒤집는다. 생전 어떤 낚싯배를 타도 멀미 한번 하지 않던 사람도 멀미를 느끼고 구토하고 싶게 만든다.
이 질병에 대해 이토록 긴 글을 써보고 표현해 본 것도 처음이다. 어디서도 이 정도의 증상에 대한 자세한 글을 읽지 못했다. 연구자들도 쉬이 알 수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귀를 열어 이석을 확인할 수 없어 쥐를 통해서만 연구가 이뤄지고 있기에 진전이 없다고 한다. 30년이 지났어도 뚜렷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1년째 이석증 치료를 받으러 가던 병원에서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의사 선생님께 근본적인 치료법은 도대체 없는 건지 물었을 때 들은 답이었다. 그저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말고 무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덧붙이곤 하셨다.
오늘 밤은 무리하지 않고 잠에 들 수 있을까.
돈이 없어서 나는 무리하는 걸까? 그렇다면 돈이 넉넉하던 회사원 시절에 나는 왜 그리도 무리하며 살았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리하는 걸까. 그렇다면 홀로 살면 무리하지 않고 적절한 에너지를 쓰는 삶으로 살면 되는 걸까. 사랑하지 않으면, 아니 나를 살고 싶게 하는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없다면, 그들을 위해 살 수 없다면, 나는 다른 신경증을 얻게 되지 않을까? 우울증이라든지, 불안증이라든지, 강박증이라든지, 내 안에 이미 작고 미미하게 찾아온 이들을 더 키우며 지내지 않을까? 그것은 마음에 무리를 부르지 않을까?
아, 가정해 보는 방식도 무리다. 극단적이다.
중용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상태를 일상에서 꾸준히 지키고 실천해 나가는 것. 내가 중용을 찾을 수 있을까? 적절한 지점을 찾고 지켜나가라는 이야기일 텐데,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극단적이게, 무리하는 가정을 꺼낸다. 이런 무리한 가정을 실제로 살아가는 이가 나여서 그렇다. 가거나 멈추거나, 두 가지만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일까? 도무지 적당히나 은근한 삶은 만들지 못하는 걸까?
오늘의 글 분량 역시 읽기에 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