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검열 전의 몽롱한 조각들
조각 1.
산책할 때 가끔 오디오북을 듣는다.
다양한 목소리를 접해 봤는데 그중에는 - 내 귀에 - 정말 책을 잘 읽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어떤 책은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을 오디오북으로 겨우 찾았는데 목소리가 듣기 힘들어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게 내 성질머리가 고약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있지만 청각 문제였다. 성장 과정에서 '별나 빠졌다'는 소리를 집이나 친구들로부터 자주 들었기에 나는 내가 어디 한 구석 단단히 문제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이 들고 보니 그저 감각기관이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온통.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어느 하나 뒤질 것 없이 나의 모든 감각 경험에는 증폭기가 달려있다. 이런 나지만 오디오북은 들어야겠기에 선호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잘 읽어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다.)
적당히 속도감이 있으면서
(급한 건 싫지만 처지는 건 더 싫다. 느려도 리듬감만 있으면 되는데 느리게 읽으면서 리듬감 살리기가 얼마나 어렵냐면 내가 좋아하는 드러머 친구는 오디션 심사를 볼 때 아주 느린 템포만 쳐 보게 한다고 한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루는 한 미국 영성가의 오디오북을 듣는데 읽는 분이 권사님 찬송가 부르듯 감정을 싣는 바람에 산책하는 내내 배 잡고 웃었다. 웃음은 감사했지만 제가 원한 건 책의 내용이에요...)
조각 2.
불면이 익숙하다 보니
잠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집착이 있는 편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나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상태와 비슷하다.
어쩌다 개운하게 통잠을 잔 날이면 세상에 이런 행운이 다 있나 만발한 개나리처럼 웃으며 일어난다.
잠을 잘 못 잔 날도 나름의 좋음이 있는데 오늘 아침이 그런 아침이다.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이 굴러간다.
평소의 나는 짐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패터슨을 보기로 했다.
조각 3.
예전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는데
나는 내가 결혼이라는 걸 했다는 사실이 10년째 믿기지 않는 중이다. 결혼 생활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옆에 누가 이렇게 자고 있는 게 너무 이상하고 아침마다 낯설다. 그래서 오늘 아침엔 옆에서 잘 자는 사람 뒤통수를 찍어보았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그에게 설명해 줬다.
"이 사진 속 인간 오브제는 내가 10년째 같이 살면서도 옆에 있다는 게 적응되지 않아서 일단 약간의 거리를 두고 촬영했어. 그렇다고 해서 너무 멀지는 않게 적당한 친밀감은 남겨뒀지. 명암은 카쉬가 잘 쓰는 방식을 흉내 내 봤어. 구약부터 하늘아래 새로운 건 없는지 오래됐으니까."
남편이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당신은 정말 타고난 사기꾼(artist)이구나."
#yousufkarsh #jimjarmus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