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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 피하는 방법

우디앨런의 벨에포크(Belle Epoque)

by ACCIGRAPHY


우디앨런을 좋아한다.


그의 말년작 중 하나인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2) 마지막을 보면 '우리는 바로 지금 벨에포크 (Belle Epoque)를 살아가는 줄도 모른 채 벨에포크를 갈망하며 살아간다'는 메시지가 흐른다. 벨에포크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호시절 정도.


오늘 아침에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일어났다. 어제 남편과 오랜만에 게티뮤지엄에 갔다가 살짝 싸웠는데 생각할수록 남편의 행실(!)이 기가차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남편의 행실을 무의식의 노예 상태에서 꼼꼼히 복기하다 보니 아침에 먼저 일어나 거실에 돌아다니는 남편의 그림자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초점 없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천장을 바라보며 남편과 마주치지 않고 모닝커피를 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커피 대신 침대에서 뭐라도 해서 내 기분을 전환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당도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우디앨런의 글쓰기 리추얼에 관해 예전에 보았던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글을 쓸 수 있도록 침대 맡에 필기도구를 두고 잘 뿐 아니라 집안 곳곳 온갖 희한한 지점에 필기도구를 배치해 둔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작가의 벽(Writer's wall/block)을 뚫고 나가는 방법은 '잦은 샤워'라고 했는데, 답답할 때마다 이 욕실 저 욕실 돌아가며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한다 했다. 샤워하다 지치면 그냥 앉아서 물만 틀어놓는다고. 그 말을 하던 우디앨런의 세상 건조한 표정이 떠오르면서 '피식'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까지 새어 나온 마당에 나는 침대를 박차고 당당히 걸어 나와 거실 한쪽 구석에 앉아 랩탑을 열었다. 다행히 남편은 뒷마당에 있었다.


아침부터 남편을 괘씸함이라는 구덩이에 밀어 넣고 스스로의 무명(無明)에 허우적대던 나를 우디앨런은 창작의 설렘으로 인도해 버렸고, 급기야 오늘을 재밌게 살아보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2차 부부싸움이 방지되었다.




우디앨런이 그의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극 중 인물을 통해 (혹은 초, 중기작까지 본인이 연기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통해) 드러낸 그가 싫어하는 것과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크게 나는 공감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영화 애니홀 (Annie Hall, 1977)을 보면 영화관에 입장하기 위해 여자친구와 함께 줄을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친구가 그날따라 기분이 별로인 데다 오래 줄 서있는 상황 자체가 짜증 나는 와중에 뒤에 서 있는 남자가 같이 온 여성을 의식해서 그날 상영될 영화에 관한 비평적 감상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대중문화이론 시간에 배운듯한 온갖 현학적 용어들을 성실히 읊어가며 말이다.


청하지도 않은 남의 의견이 내 귀에 큰 소리로 꽂히고 있는데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 그 남자가 선택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인상을 점점 더 찡그려가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우디앨런은 조용히 일격을 날린다.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아는 척하는 거 부끄럽지 않아요? 감독이 그렇게 의도한 작품인지 감독도 아니면서 어떻게 알아요? 그 감독 데려와 볼까요?"


하고는 실제로 세트장 코너에 숨겨놨던 그 감독을 그 남자 옆에 대령하여 그 남자가 틀렸음을 입증한다. 그리곤 카메라를 응시하며 우디앨런은 말한다.


"사는 게 진짜 이랬음 얼마나 좋겠어!"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랬다.

저런 폐쇄적 상황에서 목소리 크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어릴 적부터 꾸준히 싫어해 왔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다양한 면에서 마음에 들었는데 혼자 중얼대는 신경쇠약적 연기와 미세한 짜증 포인트를 그만의 철학과 미장센으로 풀어내는 감각이 놀라웠다.




미국은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드는 나라다.

개인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표현을 잘할수록 존경을 받는데, 그것도 나름의 맛이 있지만 도통 내 맛은 아닌지라 아직도 메이저 감성의 미국인 친구들은 별로 없고 같이 노는 친구들은 대부분 우디앨런이나 짐 자무시(Jim Jarmusch)처럼 마이너 감성의 사람들이다 (실버레이크에 사는 이유도 이것).


나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일 수도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찌 됐든 섬세하고 담백한 당당함을 편애한다. 그런 이의 존재감은 입을 벌리지 않고 가만 있어도 발산된다. 내 생각에 우디앨런은 그걸 가졌다.


그는 내 20대 취향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사상적 면모보다는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 그것을 바탕으로 한 다작적(Prolific) 성향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에게 정말 웃긴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웃긴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웃겨주면 그 대상에게 부채의식을 갖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더 그의 영화에 몰두했는지 모른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효도하기를 갈망한다. 부모님은 나를 많이 웃겨주셨기 때문이다.




오늘은 파란색 마커가 귀여워 보여 파란색으로 작게 적었다. 매일 아침 떠오르는 문장이나 단어를 캔버스에 적는다. 이제 겹이 꽤 많이 생겼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재즈클럽을 사랑하고 클라리넷도 잘 불면서 뉘 집 부부싸움도 방지해 준 우디앨런에게 감사하며 UFO(United Future Organization)의 Loud Minority!


#unitedfutureorganization #loudminority #play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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