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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Jan 02. 2023

길바닥에서 맞이한 새해

정말 여기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집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 우리는 이번 로드트립의 종착지인 샌디에고로 향했다.


우리 부부 외에 두 커플이 함께했는데 아침부터 친구들을 만나 기분이 많이 업된 나는 본격 하이킹을 시작하기 전에 친구들에게 집에서 만들어 온 거대 주먹밥을 건넸다.


"우와! 이거 너무 웃기게 생겼는데 진짜 맛있어! 밥에 이거 다시마야?"


"어. 더 깊이 깨물면 토로로 곤부(얇게 썬 다시마) 간장에 절인 반숙 계란이 나타날 거야!"


계란 하나를 밥으로 둘러싸는 데는 의외로 많은 밥이 필요했고, 친구들은 주먹밥  알에 공깃밥  그릇 정도가 뭉쳐졌을 것이라 수군댔다.


본의 아니게 밥이 많이 묻은 주먹밥은 오전 하이킹에 필요한 연료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토리 파인즈(Torrey Pines)와 블랙비치(Black Beach)를 하이킹 코스로 삼은 우리는 초반 오르막 난관을 극복하자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단체로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산들바람이 부는 초록 절벽에 푸르른 태평양이 넘실대는데, 절벽 쪽으로 가까이 가서 보니 바다 모래 색깔이 이름에 걸맞게 검은빛이 돌았다.


얼른 바다 쪽으로 뛰어 내려간 우리는 파도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자갈 구경에 나섰다.


해안가의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우리나라 동해안 스타일이 아닌, 해안가에서 수십 미터 까지 그저 평평한 해안이었는데, 파도 대여섯 개가 겹겹이 동시에 다가오면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파도소리를 만들어냈다.


웅장한 파도소리로 인해 부분적 감각차단 (Sensory Deprivation) 상태로 들어가 버린 나는 남편과 친구들을 몽땅 잊은 채 찰나의 지복 (祉福)을 누렸고,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 상태에 잠시나마 있을 수 있게 됨에 감사가 차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편과 친구들은 저 먼발치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향인이지만 각성 모드에서는 사람들과 노는 것을 심히 즐긴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함께일 때 남편이 종종 삐지는 경우가 있다.


샌디에고 날씨는 바닷가라 그런지 변화무쌍했는데,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불꽃을 보며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기로 했던 우리는 뜻밖의 비소식에 호텔 방에서 윷놀이를 하며 카운트다운을 보기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나는 혼자라도 나갈래."


남편의 돌발 선언이 툭 튀어 나왔다.


'아니, 다 같이 놀자고 이 뜻깊은 날 모였는데 카운트다운을 혼자 비 오는데 바닷가에서?'


사회성 결여가 의심되는 저 발언이 나오자마자 나는 남편이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저 발언을 좀 덜 이상하게 무마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나는 둘 다 괜찮은데 당신 나가면 따라갈 거야!"


해맑게 웃으며 뱉은 내 말에 친구들은 'I will follow him~'을 부르며 나를 놀리기 시작했고, 자기를 따라가겠다는 내 말에 남편 얼굴엔 활짝 웃음꽃이 폈다.




"얘들아 그럼 내년에 만나자! 우리는 비 오는데 밖에서 새해 카운트다운 좀 하고 올게, 10분 뒤에 만나!"


남편 손을 잡고 호텔 로비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우리는 비바람에 강하게 후드려 맞으며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하늘 쪽을 바라보았다.


야자수들이 비바람에 90도 절을 연신 해대는 상황 속에서도 남편을 위해 길거리에 꾹 참고 서있는 나를 보자 남편은 웃음이 터졌다.


"당신 괜찮아? 너무 춥지? 다시 호텔에 갈래?"


광풍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나는 남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길거리에 대고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를 질러보았다.


"햅삐 뉴우 이어어얼~!!!"


길에 있던 사람들은 나의 외침에 코요테 하울링을 해 주었다.

우리처럼 정신 나간 사람들이 몇 몇 있었던 것이다.


계획대로 길거리에서 새해를 나와 맞이하게된 남편은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호텔로 다시 돌아와 방으로 올라가기 전 로비에 잠시 앉아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 근데 아까 왜 혼자라도 나가려고 그랬어? 친구들이랑 카운트다운 같이 하면 좋잖아!"


"응 그냥, 당신이 친구들이랑 놀 때 모습이 나랑 놀 때랑 너무 달라서 좀 서운했어."


"에잉? 진짜? 서운할 것도 쌨다. 그럼 당신도 친구들처럼 좀 해줘봐! 나는 항상 같은 사람인데 당신이 친구들만큼 안 받아주잖아!"


"근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

.

.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또 급 수긍이 되면서 나는 고집부리기를 그만두었다.


"알았어. 그냥 나는 당신 세상에서 젤 좋으니까 그것만 알아줘. 빨리 올라가자. 친구들 기다린다!"


"응!"




노느라 사진을 많이 못 찍었다. 구름 낀 토리 파인즈 트레일 모습. 팔을 많이 흔들면서 걷는 편.


오묘한 색깔의 돌맹이들이 하나 하나 우주를 유영하는 행성들처럼 보였다.


<Cool and Steady and Easy>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 가사 중 일부. 2023년의 모토로 삼기로 했다. 이합장지에 먹으로 썼고 2017년 작업이다.





#brooklynfunkessentials #미국여행 #박지영캘리그래피 #accicall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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