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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Jan 19. 2023

맥북의 수명과 부부의 취향

매개된 욕망


"그러지 말고 그냥 하나 사. 비싼 거 사!

또 싼 거 사서 몇 년 만에 버리지 말고!

알았지?"


남편 노트북이 또 말썽이다. 


남편은 사물의 결을 잘 살피지 않는 습성이 있어서 그가 사용하는 전자제품, 옷 등은 소위 내용연수가 차기도 전에 바로 헌 것이 되어버리는데 더 기가 찬 것은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자마자 헌 걸로 만들어서 좋지 않은 상태로 오래 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품목이 랩탑!

나는 결혼해서 랩탑을 작년에 딱 한번 샀다. 결혼 전에 샀던 2011년 형 맥에어를 주욱 사용하다 11년 만에 구매한 랩탑이다.


남편은 그 사이에 네 번째 랩탑을 구매했다.

그 이유는 내가 보기에 너무 명확하지만 본인은 의아해한다.


수백 가지 이유 중 하나만 들자면

뭔가를 클릭한 상태에서 처리가 진행 중인데 계속 클릭을 한다던지 새로고침을 눌러대는 등의 행위, 과도한 업데이트, 그리고 먼지 방치!


하나만 하고 싶었는데 남편 미안.




재외공관 근무하면서 '내용연수'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나랏돈으로 산 사무기기는 내용연수가 끝나기 전에 맘대로 폐기하지 못한다. 내용연수가 종료되기 전에 폐기하려면 복잡한 불용 신청 절차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한다. 조달청 공지에 따르면 랩탑 내용연수는 5년이었는데 그 표를 보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다. 


'랩탑을 5년에 한 번 바꾼다고?'

스무 , 인생  랩탑을 맥으로 시작한 나로서는 이해할  없는 내용연수표였다.


"자기야, 당신도 이번에 고장 난 김에 애플 써봐!"


"난 애플 싫어해. 내 라이프스타일이랑 안 맞아."


신혼 초부터 남편은 맥을 좋아하는 나를 이유 없이 공격해 왔다. 나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온갖 맥에 관한 소문을 대가며 비싸기만 한 그런 제품을 왜 쓰냐고 자주 귀찮게 했다. 나는 남편 말이 하나도 맞는 게 없어서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사랑스럽고 안정적인 내 랩탑을 그저 꾸준히 사용해 왔다.




"자기야 나 지금 코스트코에 있는데 저녁에 피자 먹을까?"


"아니! 감자탕 하고 있어 얼른 와!"


코스트코에 들러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집에 온 남편 손에 박스 하나가 들려져 있다.

한 꺼풀 포장을 벗기니 사과모양 로고가 나온다.


자기 라이프스타일이랑 안 맞다더니 하루 만에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셨는지 내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다. 살다 보니 남편이 맥북을 사는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제프리가 맥북 10년째 써도 멀쩡하다고 써보라 하더라고."


내가 10 동안 직접 쓰면서 보여준 행동은 남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남편 동료의  마디는  울림이었던 양.


묻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말을 이어간다.


"당신 지금 쓰는 거랑 똑같은  샀어. 리뷰가 아서."


같은 걸 샀다기에 남편 대신 언박싱을 하고 있는데 가만 보니 같지가 않다! 내 거보다 한 버전 늦게 나온 더 좋은 놈이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대면서 이걸 어떻게 내 걸로 만들지 지극히 평균의 뇌를 풀가동 해본다. 


"자기야,  시각적으로 엄청 예민한  알지(시각 말고도 다 예민함)...  지금 쓰는 모델보다 이게  시각적으로 안정적인  같애."


"아니야, 이거 둘 다 똑같은 모델이야!"


"어. 그니까. 똑같으니까 상관없잖아. 나 이걸로 써야겠어."


남편은 '둘 다 똑같다'는 치명적 실언을 하고 나서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표정을 보니  없이 동정심이 치솟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나는 일관적 표정을 유지한다.


나의 온갖 데이터가 새 랩탑으로 이사하는 모습. 이걸 바라보는 나의 흐뭇한 표정은 차마 담지 못했다.


흐뭇한 표정은 담지 못하고 내적 댄스만 표현해 본다. 작년 발행한 브런치북 '아스팔트우주'에서 발췌. ACCI CALLIGRAPHY 2022




결혼한 지 십 년이 흘러 강산이 변했고 남편도 맥북을 자기 돈 주고 사는 사람으로 변했다.


자려고 누웠는데 남편이 불쌍하다.

오랜만에 새 랩탑 샀는데 놀부 같은 부인한테 뺏기고 헌거 쓸 신세라니.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매개된 욕망'을 처음 듣고 이마를 탁 치며 휘둘리지 않고 내 정신으로 살리라 결단하고 살아온 날들이 무색해지는 밤.




#르네지라르 #accicall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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