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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Feb 22. 2023

자기 직업을 여러모로 사용하는 자

백정의 칼놀림


"접시는 여기, 뜨거운 음식은 저 쪽에 있습니다. 포크랑 나이프도 잊지 마세요!

바로 앞에 있는데 다들 어딨냐고 꼭 두 번씩 물어본다니까!"



엊그제 머물던 숙소의 식당 직원이 건넨 말이다. 자그마한 흑인 아저씨의 반짝이는 얼굴과 감미로운 화법에서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걸 넘어서서 자신의 직업적 임무를 관조적 (Contemplative) 목적으로 사용하는 자의 위엄과 느긋함이 있었다.


그는 테이블을 어슬렁 산책하듯 돌아다니다 아이를 발견하면 눈을 찡긋하며 핫초콜릿을 원하는지 물어보았다. 질문을 들은 아이는 순간 얼굴에 꽃이 살짝 피려 하다 부모 눈치를 먼저 살피고, 부모가 웃으며 끄덕하면 비로소 꽃이 만개한다. 거절하는 어린이에겐 '벌써부터 그렇게 빡빡하게 살면 안 된다'며 부드러운 호통을 날린다. 테이블에 앉은 온 가족은 깔깔대고 나같이 엿들은 사람들도 킥킥댄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자기부상열차 처럼 접촉하는  무엇과도 마찰하지 않고 홀롤롤롤 돌아다녔다. 그의 존재 양상은 장자가 말했던  백정의 칼부림과도 비슷했는데 - 읽은  이십 년이 넘어  기억은  나지만 - 경지에 오른 백정은  관절의 뼈와  사이 공간만을 노리다 보니 칼이 뼈에 닿을 일이 없어 평생 칼을 갈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장자의 과장된 화법을 좋아한다. 터무니없는 와중에 갈이 있는데  갈이 터무니없음으로 인해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 아저씨는 포크와 칼이 눈앞에 훤히 있는데도 사람들은 보통 음식에 눈이 멀어 잘 챙기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뇌리에 꽂혔는지 베이컨을 꼭꼭 씹는 리듬에 맞춰 그 말도 꼭꼭 씹고 있는 나를 마주한다. 여러모로 신기한 문장. 저 아저씨가 혹시 전생에 필봉이 많은 태백산맥 남단에서 이뭣꼬 수행을 하다 간 분은 아닐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살다 보면 첫 만남에 터무니없이 익숙한 느낌을 주는 사람 (예: 남편)이 있는데 이 아저씨도 그랬다.


창 밖 풍경을 감상하면서

하이킹을 하면서

남편과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담을 하면서 내심 그 아저씨가 내게 던진 문장이 날파리처럼 윙윙 내 안을 돌아다녔다.




중앙에 있는 곡선형 고원을 보며 남편에게 저게 지구가 둥근 증거라고 했다. 예전엔 이런 말 하면 다큐로 받아들여서 많이 싸웠다. 어제는 남편이 빵 터져서 흐뭇했다. 이혼 안 하길 잘했네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 남편을 찍은 건 아니고 돌다리에 걸린 태양이 주인공이다. 나는 태양을 좀 많이 좋아한다. 사진은 그저 그래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볼만함.


'웡웡'같이 생겼지만 '윙윙' (wings_techpen) 3000px X 1000px, Procreate작업, ACCI CALL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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