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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Feb 25. 2023

미국의 좋은 동네 지표

친구의 가설




미국에 살아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문화 인종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자연스레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도 지역 나름인 데다 나처럼 서른 중반에 이민을 온 경우는 한국 회사나 한국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인 커뮤니티에 잦아드는 경우가 흔하지만 어찌 살다 보니 나는 그런 다양성의 수혜자로 살고 있다.


'나라면 그렇게 생각 안 할' 것을 각양각색으로 바라보는 친구들 덕에 어느 정도 열린 시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고 믿고 산다). 내 생각엔 이런 게 복이다. 자기 생각과 방식에 갇혀 사는 것 만한 형벌도 없기에 나는 매일 적어도 하나쯤은 생전 안 해보던 일을 해 보려 하는 편이다. 그게 저녁을 준비하며 마늘 다지는 방법에 변화를 주는 것 같은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살다 보면 쓸데없는 무형의 짐을 덜 이고 지고 살게 되어 앞날의 나를 형성할 새로운 것들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는다고 믿는다.


그 각양각색의 친구들 덕에 여러모로 재밌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지난주 친한 친구네 커플과 아침 하이킹을 다녀오는 길에 하나의 관점을 접했다.




그리피스 파크에서 신선한 공기를 맘껏 흡입하고 배가 고파진 우리는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실버레이크 저수지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달리기 하는 여성들이 많이 포착되었다. 나는 매일 산책하며 보는 광경이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데 친구가 말했다.


"운동복 차림의 백인 여성이
달리기를 많이 하는 동네인 걸 보니 좋은 동네군!"


파이낸스 분야에서 일하고 언어 쪽에도 재능이 많아 흔한 언어는 기본이고 파슈토어(Pashto) 통역도 하는 독일계 미국 친구.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라 흥미가 돋았다.


"왜애?"


"미국엔 카스트제도가 없지만 인도에 버금가는 카스트가 존재하거든. 유대 계열은 일단 열외로 하고, 자본의 논리로 보나 사회 문화 인종적 텍스트로 보나 미국에서 백인 여성은 브라만 계급이라고 보면 돼. 우리 요즘 집 보러 다니는데 백인 여성이 달리기를 하고 있는 동네 위주로 보는 중이거든 (웃음)."


대놓고 속물적이면서 위트 있는 발언에 다 같이 깔깔 웃었다. 나는 그래서 이 친구를 좋아한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이 잘 없는데 이 친구는 불일치가 더 어려운 사람이라 배우는 점이 많다.




그러고 보니 파친코(Pachinko)의 저자 이민진이 수년 전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맥락을 언급했던 기억났다.  그녀는 온갖 출판기념회나 문학 행사 등에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백인 여성들이며 그들이 미국 출판산업을 먹여 살리는 핵심 동력이라고, 백인 여성들로 우글대는 행사장에서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 특유의 묘한 웃음을 지으며 던진 그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백인 여성들을 부끄럽게도 으쓱하게도 만들었는데 이래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구나 싶었다. 그녀는 함의로 점철된 문장을 글 써 내려가듯 말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구어체는 문어체다. 변호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입에 자동 퇴고 장치가 생길 만큼 다지고 또 다졌을 것이다. 법정에서의 변론이 출판기념회에서 문학적 달변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인생이 얼마나 희극적 요소로 넘쳐나는지 이마를 치게 된다.




대낮에 달리기 하는 백인 여성이라는 파사드(Facade) 뒤에 감취진 사회, 문화, 자본의 부조리나 상징은 다양하겠지만 그것을 순진무구하게 일축하면 '팔자 좋은 사람'이다.


팔자 좋은 미국 브라만들은 독서와 달리기를 한다.


인간이 드디어 여유로운 상태에 도달하면 할 일이 뭐가 있나 두리번 대다 하는 일이 독서와 달리기 인 것이다. 물론 진정한 고단자(高段者)들은 생업에 종사하며 육아를 하며 나라를 지켜가며 짬을 내서 독서와 달리기를 하겠지만 중요한 지점은 어쨌든 이것을 '한다'는 것이다.


독서와 달리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다.

달리기는 몸, 독서는 정신의 확충(擴充) 작용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 백인 여성들은 브라만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라 봐도 무방하다. 브라만이 계급적 의미로 고착되기 훨씬 전부터 힌두 제례에서 브라만은 '베다(Veda) 읽는 사람'을 의미했으니!


나는 알 수 없는 삶의 이끎으로 그들과 같은 동네에 살게 되었으나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회 문화 경제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두 행위에 열을 올리는 건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사람이 갈 곳이라는 게 어느 정도 뻔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실망스럽기도 안심도 된다.


나는 달리기는 별로라 독서 + 걷기를 택했다.

내 동생은 독서 + 테니스를 한다.




청명했던 지난주의 그리피스 언덕. 비가 오고 봄도 와서 색이 만발했다. 평소 모습은 우중충한 갈색 언덕이다. 캘리포니아주의 상징인 양귀비 (보통 파피 poppies라고 함) 꽃.


방금 산책 다녀오는 길에 마주한 "FREE" 박스 안의 자몽들. 이런 귀연 짓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 달리기 하는 백인 여성들이라는 게 왠지 살짝 맘에 안들지만 일단 하나 가져옴
몰라 (어른 + 나비_inkbleed) 1000px X 2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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