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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r 18. 2023

새벽 3시의 통역

오대산 월정사




나는 삶의 대부분을

마이너 감성으로 살아왔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고 살다 보니 그랬다. 초딩 때도 친구들은 서태지를 들을 때 나는 송창식을 좋아했다. 친구들은 송창식 듣는 나를 이상하게 봤지만 나는 송창식을 못 알아보고 대세를 따르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다행히 나는 송창식보다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으므로 송창식을 위해 관계를 놓진 않았다.


이런 나지만 왠지 모르게

사찰은 메이저 감성을 좋아하는데

오대산 월정사도 그중 하나.




사업 담당자, 초청 인단과 함께 방문한 오대산 월정사는 눈 내린 한 겨울이었고 고무신과 두꺼운 양말을 뚫고 올라오는 냉기였다.


나는 미끄덩 차가운 고무신이 싫었고 템플스테이 할 때 입어야 하는 찜질방 스타일의 옷도 싫었지만 (추운데 너무 펄럭거려 화가 많이 났음) 이내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스님이 뭐라 한 마디라도 하면 바로 통역을 해야 하고 젊어서 아직 호기심 많은 초청 인단의 끊임없는 질문을 스님에게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美의원실 보좌진으로 기억한다. 흔히 Congressional Staff라 불리는).


그렇게 펄럭이는 옷을 입고 눈길에 미끄덩하는 고무신을 신고 하루종일 법당과 숲에서 치이다 보니 저녁 9시가 되었다.


때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건 몸의 투정일 뿐 정신은 왠지 맑았다. 스님 말씀에 어린애들 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사람들 표정이 망막에 둥둥 떠다녔다.


다도(茶道) 시간에 한 마디 할 때마다 별것도 아닌 것에 '오~' 눈빛 초롱초롱.

발우공양 때도 한마디 하면 또 '아~'

귀여워 죽는 줄 알았다.


망막에 떠다니는 이미지를 스크롤하다 보니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오는 듯했다. 이제 눈을 좀 붙여볼까 하는데 스님이 깨우셨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나는 믿을 수 없었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잠들어 힘쓸 줄 모르는 손가락으로 양말을 발에 억지로 끼워 넣고 못생긴 고무신을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우리를 지도해 주신 스님께선 털 고무신을 신고 계셨는데 수면 부족 상태에서 그 모습을 보자 약이 올랐다.


"여러분!
새벽 3시가 어떤 시간인 줄 아세요?
온 우주가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비몽사몽의 나는 속으로 ' 우주는  과한데...' 했지만 그대로 통역했다. 스님은 눈곱도 떼지 못한 우리를 끌고 전나무 숲으로 걸으며 법문을 시작하셨다.


허허! 걸으면서 법문은 반칙인데... 나는 비몽사몽에서  5 만에 밥벌이 모드로 전환해야 했다. 다행히 스님의 화법은 너무 길거나 짧지 않은 리듬으로 필기 없이도 통역이 순조로웠다. 단문을 주로 사용하셨고 주동일치에 신경 쓰셨으며 메시지가 명확했다. 브라보!


깜깜한 새벽, 전나무 숲에서의 가르침은 이어졌다.


"여러분! 하늘에 별이 참 많죠? 누워서 보면 더 잘 보입니다. 누우면 서 있느라 사용되는 힘이 보는 힘으로 가거든요."


그게 정말인지 알 길이 없었기에

경험적 앎을 중시하는 자들부터

한 명 두 명 눕기 시작했다.

나도 누웠다.


오마이갓.

진짜 더 잘 보였다.

그리고!

누워서 통역하니까 더 잘됐다!


그 뒤로 스님이 한 말은 다 까먹었지만

별을 누워서 봐도 되는 상황이면

꼭 눕기로 다짐했다.


별 말고도 누워서도 가능한 일은

꼭 누워서 하고 함부로 앉거나

스지 않기로 했다.




전나무 숲 속 법문이 끝나고 아침 발우공양 후 108배를 하며 108개의 나무구슬을 꿰어 염주를 만들었다. 염주 만들기는 또 다른 스님이 진행하셨는데 스님이 나무구슬 하나당 한 마디 씩 하시는 바람에 힘들어 눈물이 맺혔지만 이상하게 몸에는 힘이 돌았다.


이 모든 걸 다 하고도 아침 7시도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과연 집에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시간은 어찌어찌 흘러갔고, 점심 무렵 우리는 타고 온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초청인단에겐 월정사가 마지막 일정이었다. 일주일 동안 같이 한국을 돌아다니면서 삼시 세끼 함께 먹고 웃었던 사람들을 보내려니 슬픔이 몰려왔다. 한 두 번도 아닌데 매번. 한 생을 함께 한 기분이었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상태에서 버스에 앉아 무념무상으로 창밖을 보는데


스님이 새벽 3시에 온 우주가 깨어난다고 했던 말이 묻고 따질 게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의 108배 현장에서 만들어진 108알 염주(정식 명칭 모름). 보로부두르 사원의 부처님과 월정사의 만남.


남편이 고양이를 많이 좋아한다. 작년 여름 팔공산 동화사. 이 사찰도 메이저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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