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 코미디언 조지 칼린을 좋아한다.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으며 여타 미국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냉철함과 참신함이 있다. 직업적 본분에 맞게 사람 웃기는 일을 탁월하게 수행하면서 사람들이 눈치 못 채는 사이 생활 밀착형 가르침을 슬며시 남겨놓고 무대를 떠나는 모습이 몹시 내 취향인 것.
내가 조지 칼린을 좋아하는 이유와 헤겔을 싫어하는 이유는 서로 닿아있는데, 헤겔은 뭔가 잔뜩 줄 것처럼 연막을 치지만, 막상 들어보면 들을만한 소리는 몇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내 책이나 칸트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책을 볼 시간에 헤겔 책을 보느라 삶을 낭비한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나 죽을 지경이다.
내 염세 성향의 근원에는 사람들을 사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연민의 감정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다. 영어권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연민'이라는 단어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동정 따위로 축소시키는 것을 보는데 연민은 그런 감정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연민은 인간 포함, 모든 '알아차림이 가능한 존재'(sentient beings)들이 '존재하느라 힘든 마음을 서로 공감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덜 힘들라고 나는 꾸준히 책을 쓰고 있는데, 내가 쓴 책들은 인기가 없고, 내 모친처럼 지극한 범부중생이 쓴, 말초적인 것에만 관심 갖는 대중들을 볼 때면 애초에 내가 왜 염세적이 되었는지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같은 책이 백 부 밖에 안 팔리는 세상은 정말이지 좀 별로이지 않은가? 그 백 명 중에는 내 지인들도 꽤 있는데 책 내용이 뭔가는 있는 것 같은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그들 탓이라고 말해줬다. 단언컨대 나는 그 책을 더 이상 쉬울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읽히도록 썼다.
나는 헤겔 스타일의 현학적이고 알맹이 없는 문체를 혐오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조금이라도 주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정말 내가 안다고 확신하는 것들 중에서도 내 경험을 토대로 직관적으로 썼기에 정신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알아먹어야 마땅하다. 인생 중반 정도는 살았는데도 그 책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면 당장 손에서 놓기를 바란다. 그 정도 개념을 이해할 정신의 힘도 갖추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건 욕심이며, 어차피 인연이 아닌 가르침은 흘러간다.
그래도 나는 연민 있는 인간이므로 한마디만 해야겠다. 먹는 것에 대한 의지가 표상으로 나타난 것이 입이라면 개인으로서의 내 존재의 의지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생긴 존재로 세상에 던져진 것일까? 개별자로서의 한 인간의 의지는 성격, 경향성, 재능 등에 해당하고,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다면 그게 우주가 나보고 표상하라고 한 의지이다. 한국인들은 특정 부분에 재능이 있는 상태를 "타고났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직관적인 표현이다. 누군가가 음악을 타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음악이라는 의지를 표상하도록 태어난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보면 자기가 남과 어떻게 다른지, 내가 표상할 개성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고(여러 가지 해보지 않아도 이유 없이 끌리는 것들이 있다. 큰 힌트다.) 암만 봐도 자기만 가진 그 무언가를 모르겠으면 그 모습 그대로 할만한 거 하고 살면 된다. 우열이라는 게 없다. 무슨 캐릭터를 부여받고 이 세상에 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캐릭터로 어떻게 적극적인 창조를 해 나갈 것인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당장 끌리는 것들, 할만한 것들을 몰입해서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내가 어떤 의지를 품고 왔는지에 대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몰입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재미가 붙고 지치지 않으며 내 의지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내 의지를 알아가고 나타내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 연민이다. 내 캐릭터에 대한 속사정은 나밖에 알 수가 없고 타자는 그저 수많은 표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더군다나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사실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타자를 표상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들로 범람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산다는 것은 직관에 깊이 몰입하여 순수하게 인식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타자들이 그저 다른 표상으로 보이지 않고 그들의 의지(속사정)가 내가 내 의지 보듯 보인다. 그러니 그들을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내 모친은 타자를 표상으로 보는 인간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엄마라고 다 모성애가 있어서 자식이 본인보다 더 빛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온 존재로 표상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그런 저급한 의지가 표상된 세계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고, 고급한 의지가 표상된 세계도 한번 경험해 보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순수하게 인식하는 자로 살아가면 여러모로 삶이 재밌어진다. 일단 객관 세계가 순수하게 인식하는 나 없이는 존재가 성립하지 않음을 보게 되어 자존감이 하늘을 치솟게 되는데, 험한 세상 살아가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의지라는 게 있고 표상이라는 게 있어서 삼라만상이 굴러가는데 나만이 표현해야 할 의지가 있다. 그런데 순수 인식 상태가 되면 그 나만의 의지라는 게 타자들의 의지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어 자타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연민이라는 감정이 결과적으로 흐른다. 연민은 사랑이다. 그 '상태'에서 -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상태 - 내가 가지고 온 의지를 객관 세계에 역량껏 표상하면 된다.
그러자고 다들 사는 것인데, 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알고 하면 재밌고, 하고 있는 줄 모르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