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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Oct 29. 2022

지금 시절

 

현생 시작

나는 여성이고 한국에서 태어났다. 나 바로 위 언니는 피부가 나보다 검고 눈이 크고 예쁘다. 종종 나를 등에 업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재워준다. 이 언니 외에 두 명의 언니가 더 있다. 첫째는 피부가 하얗고 오밀조밀 예쁘게 생긴 데다 성격도 좋고 똑똑해서 인기가 많다. 둘째는 보이쉬한 복장을 좋아하고 카리스마가 있는데 얼굴은 매우 귀여워 반전미가 있다. 우리 중에 제일 다정하다. 동생도 있는데 명석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우월한데 뭔가 사는 게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많다. 우리 중 가장 오래된 영혼이다.


나는 부모도 있는데 그들은 별거 아닌 것에 잘 웃고 둘이 잘 논다. 우리 놔두고 둘이 팔공산에 가서 찌짐을 몰래 먹고 오거나 할 때도 있는데, 그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흐뭇하다. 부모가 둘이 재밌게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자란 덕에 나는 세상이 재밌는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가끔 싸우기도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심장이 블렌더에 갈려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자주 그러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탄생(아빠체_street), 1000 X 2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내가 태어난 이 집의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적 유일신을 좋아한다. 기독교적 구원관은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쓸 만큼 싫지는 않아서 나도 이번 생은 이 길로 영혼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나는 내가 물욕이 많은 기질을 타고났음을 알 수 있었고 세 살이 되기 전에 싹을 잘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욕이 나쁜 건 아니지만 어떤 기질이든 태과불급은 성장에 거추장스럽고, 나는 내가 이미 가지고 온 다른 욕망에 집중하고 싶었다. 


큰 결심을 마친 어느 날, 나는 내 물욕의 상징과도 같았던, 내가 즐겨 타던 빨간색 장난감 자동차를 해체했다. 그리고는 내 몸만큼이나 커다란 작은 방 창문을 낑낑대며 열고, 그 아래로 그 부품들을 하나하나 떨어뜨렸다. 아파트 3층 높이에서 화단으로 떨어지는 부품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의식은 꽤나 효과가 있었다. 그때 그 작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100여 년 남짓의 시간 중 30여 년 정도는 남의 욕망을 처리하느라 허망하게 보냈을 것이다.


첫 명상의 기억 : 밤비 내린 아스팔트

유년기로 접어들면서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다양한 방식으로 명상을 즐기곤 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비가 온 뒤 밤에 하는 산책이었다. 나는 시커멓게 반짝이는 아스팔트 위에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로등 불빛을 응시하면서 걸었다. 처음에는 가로등 불빛이 가로등 불빛으로 비치지만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불빛은 광활한 아스팔트 우주를 휙 휙 지나가는 빛의 파편으로, 다시 별들로 둔갑했다. 빛의 파편이 별들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내가 고향에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나는 고향집 별들 사이에 둥둥 누워 한참을 쉬다 나오곤 했다.


아스팔트 코스모스(아빠체_street), 1000 X 2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열여섯 살 지구인

청소년기에 나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본격적으로 매료되기 시작했다. 아빠와의 관계가 유독 좋은 나는 기독교에서 창조주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물론 엄마도 좋았지만 아버지는 지극히 내 취향의 인간이어서 좋았고, 엄마는 보편적으로 사랑스러운 인간이라서 좋았다.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아버지' 하고 운을 떼면 나도 모르던 내 안의 말들이 흘러나오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기쁨이 너무 커서 가끔은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어 학교 복도를 뛰어다녔고, 급식을 먹다가 음식 재료들의 맛이 너무 깊이 느껴져서 폭소가 나왔다. 음식은 나에게 너무 큰 사랑을 주었다. 온몸을 던지는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 등교를 즐겼는데, 별다른 의도는 없었고 걷는 게 목적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태초의 운동장을 혼자 거닐다 보면 유년기 때 자주 갔던 아스팔트 고향이 나타났다. 나는 틈만 나면 내 고향으로 걸어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와 고민 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루미(Jalaluddin Rumi)나 이븐 루시드(Ibn Rushd) 혹은 장자(莊子) 같은 사람들도 만나서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도 하고 그랬다. 


하루는 장자에게 호접몽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작자로서 의도한 바가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인간들은 매사 너무 진지하고 심각해! 거기 뭐 해석할 거리가 있어?!'라고 반문했다. 나는 그와 함께 잔잔하게 웃으며 아스팔트 우주에서 빠져나와 교실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내 친구들도 이 태초의 운동장을 거닐었으면 싶었다.


하루는 아스팔트 고향에 있다가 갑자기 영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 지구임을 알아채버린 것이다. 한 개인의 역사에서 자전축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시 지구의 헤게모니 언어는 영어였는데, 이는 전생 북미 대륙 출신으로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기억하려고 애쓰면 입에서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언어에 '원래 통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은 학습 과정에 큰 힘을 발휘했다. 새로운 단어를 외울 때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초면이 아님을 넌지시 알리면 그만이었고, 문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뒤돌아보면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과정이 너무 재밌었기에 지나고 나서야 내가 열심히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구면이라도 서로 다시 친해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인의 목소리로 녹음된 신문 기사를 듣고 그대로 따라 읽었는데, 읽을 때 보다 들을 때 체력소모가 심했다. 귀로만 들어서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정 발음이 나올 때 구강구조, 성대 울림, 소리의 발생지점과 이 과정에 사용되는 모든 근육들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면서 의미도 함께 각인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낭송은 큰 소리로 할수록 효율이 높았기에 야자 시간에 친구들이 없는 빈 교실에 혼자 앉아서 했는데, 서른 번 정도 읽으면 대충 외워졌다. 그리고 열아홉 즈음, 나는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인(아빠체_street), 1000 X 2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스무 살 여행자

청소년기에 예수로부터 파생된 모든 종교적 가르침에 파고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기독교는 토착화가 많이 진행되었음이 느껴졌다. 종교의 토착화 현상은 발생지에서 벗어나는 순간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자연 현상 같은 것이라지만 원형(原形)이 어땠는지는 꼭 알고 싶었다. 원형을 알게 되면 먼길 돌아 한반도에 다다른 하나님 아버지가 더 애틋하게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문방사우를 들고 유럽으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츠빙글리(Zwingli Ulrich)를 좋아했던 나는 그가 활동했던 취리히에서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초 가을 무렵이었는데 생각보다 쌀쌀해서 H&M에서 따뜻한 재킷을 하나 사 입고는 차가운 길바닥에 문방사우를 펼쳐놓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글씨는 내가 열두 살 때부터 수신(修身)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츠빙글리 동네 사람들은 내 글씨에 꽤나 관심을 보였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들 중 다수가 내 글씨가 일본식 선(禪)을 표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일단 그들이 너무나 강렬하게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당시 유행이었음) 어차피 나는 일본 사람도 좋아하고 선도 좋아하며, 남의 생각을 고치는 걸 싫어한다. 물론 그 해석 말고도 사람마다 보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고, 나는 그들이 보고 싶은데로 보는 걸 구경하는 게 재밌었다. 나와 다른 법계(法界)에 사는 그들이 하나하나 진귀했고, 내 글씨는 타인의 세계를 관람하는 티켓이 되어주었다.


나는 츠빙글리 동네에서 칼뱅 동네까지, 대충 2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눈에 보이는 성당이나 교회를 들어가 보고, 그 안에서 통성기도를 하고 관상기도를 하고,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들의 이방신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범신론자, 범재신론자들과 사랑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파티를 하며 그들과 함께 반짝이는 새벽 길거리를 걸었다.


한 번은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글씨를 쓰다가 불법행위로 간주되어 경찰한테 여권을 빼앗긴 적이 있는데, 정신없는 사이 지갑도 잃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뭐가 남은 게 있나 주머니를 뒤져보니 분홍색 10유로가 한 장 나왔다. 나는 전재산으로 뭘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빅맥 세트를 사 먹었다. 맛있었다. 남은 잔돈을 털어보니 화장실도 갈 수 있었다. 이제 온전한 빈털터리가 된 나는 벤치에 앉아 운하를 바라보았다. 이제 가진건 하나도 없고,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오래된 운하의 검푸른 물을 가만 쳐다보고 있는데 별안간 벤치에 앉아있는 내가 내 눈에 스윽하고 들어왔다. 내가 내 눈에 그렇게 들어오는 느낌은 처음이었는데 마치 남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문득 나는 내가 주인공인 영화를 찍는 중인데 단지 지금은 곤경에 처한 장면을 찍는 중일뿐 임을 알게 되었다. 그게 다였다. 희열감이 올라왔다.


그 순간 끊임없이 변하는 시공의 차원에 머물며 무언가의 원형을 목격하고자 하는 것은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그 부질없음을 알려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영화를 찍고 난리를 쳤구나 싶으니 마음 한켠이 시원했다. 그리고 그 시원함은 이내 뜨거움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원형 따위에 내가 가졌던 지대한 관심을 옳다구나 이용하여 낯선 땅으로 나를 유인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보고 서로의 세계를 구경하고 함께 뒹굴며 사랑하고 재밌게 놀아보라고. 심오병이나 진지병에 걸리지 말고 그저 맘껏 있는 그대로 너 답게 존재하라고.


유럽이 탈종교화되건 말건 나는 종교 안에 거하는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사람 안에 그리고 사람 사이에 거하는 친밀한 존재라고. 그래서 거룩한 거라고. 그러니 아무런 마음의 짐도, 인습적 죄책감이나 두려움 따위 이고 지고 살지 말고 그냥 나랑 살자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에서 글 쓰는 행위를 해줘서 고맙다고. 그건 참으로 너 다운 행동이었다고. 너에게 '길'과 '글'이 지닌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고, 네가 그 행위를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나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동네방네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영혼들을 모아 너에게 보내줬다고. 


유럽에서 만난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흔 살 유부녀

스물아홉의 나는 뉴욕에 두 달 정도 머무는 중이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고 그냥 뉴욕에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하루는 유니언역 근처 홀푸드마켓에서 계산하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대단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한 커플이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남자는 어딘가 아파 보였고, 여자는 평범했다. 딱히 눈 둘 곳이 없어 내 앞에 있던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남자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랬더니 여자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만족스런 표정을 머금은 채, 꿀떡꿀떡 물을 들이켰다. 남자는 고맙단 말을 표정과 몸짓으로 대신하며 물통을 여자 가방에 다시 넣었고, 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손으로 포근하게 감쌌다. 그들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불과 10초 사이에 나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봐 버렸고, 거기엔 너무나 많은 상징이 녹아있었다. 나도 저걸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마음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남자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신선했다. 일단 난이도 설정면에서 마음에 들었고, 물통놀이를 함께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딱히 내가 좋아서 만나기 시작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럼 왜 청혼했냐고 물었더니, 나를 만난 순간 저 여자를 도와주라고 자기 가슴이 시켰다는 것이다. 실은 나도 그 사람이 너무 막 좋은 느낌에 선택한 건 아니었다. 그냥 선하고 무해한 느낌에 나처럼 예민하고 별난 사람을 무던히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고, 현재의 나 보다는 미래의 내가 좋아할 타입의 사람 같았다. 


올해로  사람과 십 일년 째 살고 있는데 역시 난이도 설정이 적절했던 것 같다. 아직도 매일이 도전이고 매일 서로의 미탐험 구간을 발견하며, 새삼스레 실망하고 경탄하고 화내고 연민한다. 예민한 사람이 무던한 사람과 살게 되면 참극이 벌어진다고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우린 매일의 참극을 재밌게 겪어내 보기로 했다. 우린 아직 그 홀푸드마켓에서 봤던 커플만큼 물통놀이를 잘 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매사 쉽게 싫증 내는 나에게 암반석 같은 남편은 최적의 도반(道伴)이 되어주었다. 


도반(아빠체_doban), 1000 X 2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나는 남편과 다음 생에도 같이 살아볼 용의가 있는데 남편도 그럴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남편도 재밌겠다며 그러자고 했다. 계획성 투철한 남편은 지금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해놔야 한다고 했다. 지난 생에도 자기가 주도해서 미리 약속했기에 우리가 이번 생에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꼭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우린 그냥 서로 원하기만 하면 만날 거라고 했다. 


이미 그렇게 여러 번 만났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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