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CCI Nov 17. 2022

붓의 유목


나는 대부분의 내 글씨체를

길바닥에서  만들었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길바닥 말이다.


내 첫 글씨체인 나비체는

취리히 길바닥에서 만들어졌는데


아케이드가 많은 곳을 걸어 다니다가

맘에 드는 스팟을 발견하고는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추워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숫자 8을 가로로 눕힌 모양을 그리면서

손을 풀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나비 나는 모양 같기도 하고

무한대 기호 같기도 했다.


적당히 손에 열기가 다시 돌아와

그 리듬과 방향으로

한글을 써 봤는데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세계일화 (만공선사의 시, 나비체) 120*60cm, 이합장지에 먹, ACCI CALLIGRAPHY 2014




나는 이 새로운 모양이

자칫 어딘가로 도망가 버릴까 봐

내가 아는 모든 한글 단어를

그 자리에서 적고 또 적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적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내 주변으로 원형의 관객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게 한글이고, 나비체라고 말했다.


장자에 나오는 나비와

무한대 기호의 움직임을 따서 만들었다고

무의식의 흐름대로 읊었다.


무의식의 흐름이지만 사실이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철학자가 장자였고

호접몽과 무한대 기호가

무관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철학자들은

내 안에 산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의 일부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표상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인사동, ACCI CALLIGRAPHY 2004




사람들은 나비체 한글로

자신들의 사랑하는 연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을 보고 싶어 했다.


다행히 내 손에는

아까 날아온 나비가 아직 들어있어서

그들에게 그 이름들을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나비체 이야기를 다시 해달라고 했다.


그들의 친구와 가족들 중에는

사진 찍는 사람

갤러리스트

타투이스트 등 

재밌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나와 이런저런 작업을

함께하길 희망했다.




나는 감사했고

재밌었고

그 글씨를 가지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나는 사라예보에서 브뤼헤까지

홍대에서 인사동까지

길바닥에서만 얻어지는

손의 움직임을 수집했다.



Arts District, Los Angeles, ACCI CALLIGRAPHY 2018



다른 사람들의 붓은 잘 모르겠지만

내 붓은 길의 정령이 지배한다.

그래서 가자고 하는 데로 따라가 보면

어김없이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


내게 좋은 것인지 몰랐던 

그런 좋은 것들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원초적 힘을 따라간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