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맨들맨들 새 학기 미술책을 받아 들고는
신나서 한 장씩 아껴가며 넘겨보다가
한 페이지에서 시간이 멈추었다.
흰색 종이에 검은 글씨가 써져 있는
서예 작품이었는데
차분한 정자체로
'부모사랑'이라고 쓰여 있던
다른 사람들에겐
지극히 평범해 보일 수 있는
그런 글씨 말이다.
흑백의 대담하고
원초적인 힘에 이끌려버린 나는
그날 이후 붓과 함께 내 삶을 만들어 왔다.
그게 아마 내 첫 경험이었을 것이다.
원초적인 힘이 하라는 데로
뭔가를 해본 일이.
나는 붓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녔는데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선물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 후로 나는
내 시선이 무언가에 오래 머무르면
그것의 손을 꼭 잡고 따라가 본다.
평범하건 비범하건 상관없다.
하고많은 것 중에
무언가가 내 시선을 끌었다는 것이
이미 비범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