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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Nov 27. 2022

인프피에게 해로운 땡스기빙

너무 해롭자나...

MBTI를 신봉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속에는 인프피(INFP)적 성향이 일부 존재하는데, 그것은 과도한 사회적 교류를 싫어한다. 이것도 또 변할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앨런 왓츠(Alan Watts, 영국 저술가)를 좋아하는데, 그는 '나는 5분 전의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그 어떠한 의무도 없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종종 일관적 캐릭터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행위로 간주하는 사람들(대표적 예: 남편)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도 나름의 맛이 있지만 그 맛은 도통 내 취향은 아니라서 그냥 그렇구나 한다.


호텔이 아무리 좋아도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 자체가 스트레스였는지 삼일 째 저녁부터 목이 칼칼해지며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도통 감기는 하지 않는데 오랜만이다.


감기의 원인은 일상을 벗어난 것 외에도 큰 시누 둘째 딸이 질질 끌고 다니는 애착 목욕타월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나를 좀 많이 좋아하는 그 딸내미는 내가 가는 곳마다 그 큰 타월을 꽈악 움켜쥔 채 둘이 세트로 나를 따라다녔는데, 원래 흰색이었음이 분명한 그 타월은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채 온 동네 세균 샘플을 수집하고 있었다.


나도 저 나이 때 똑같은 짓을 했던 기억, 아니 더 심한 짓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 나는 땡땡이 무늬가 있는 담요를 끌고 다녔다. 단지 거기서 엄마 냄새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엄마 냄새는 엄마가 바르던 영양크림 냄새로 드러났다 - 그렇게 세균과 함께 다가와도 반겨주었다.

엄마 냄새 (나비체_rough) 10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그런 몸 상태로 드디어 그제 저녁, 우리는 본격 땡스기빙 만찬을 위해 남편 큰 이모네에 모였다.


남편은 이모가 둘이고 외삼촌이 한 명 있는데 다들 인상이 강렬하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두꺼비인데 다들 하관이 발달한 반면 보조개가 있어서 강렬하지만 귀여움으로 마무리되는 인상이랄까. 반전미를 사랑하는 내 눈엔 흡족한 관상들이다. 우리 시어머니는 '딸-아들-딸-딸' 중에 세 번째 시고, 물론 두꺼비 상이다.


음식은 남편 큰 이모와 큰 이모의 동서가 준비하셨는데, 한국 추석의 맛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나는 그날 아침 남편과 함께 일찍 호텔을 빠져나와 한국 마켓에서 장을 본 후, 모둠전을 부쳐서 저녁에 합류했다.


내가 전을 부치느라 고생하는 것을 본 남편은 사람들이 테이블 주변에 둘러서서 배석 문제로 활발한 논의를 벌이는 틈을 타, 내 모둠전이 땡스기빙 테이블 중앙 언저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은근슬쩍 배치를 바꾸어 놓았다.


지정학적 위치로 따지면 칠면조 옆 스테이크나 햄 같은 육류가 차지해야 할 자리였다. 세상 정직하고 착실한 이미지의 남편은 가끔 이런 쌔꼼한 짓도 잘하는데 이럴 때면 참 흐뭇하다.


두꺼비 집안의 실세는 외삼촌인데 거구에 우렁찬 목소리를 지녔다. 삼촌은 내가 만들어 온 모둠전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칭찬을 하셨다. 그러면서 남편 집안에 요리 잘하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들어와서 얼마나 좋냐며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시어머니는 입에 음식이 있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며 미소로 화답했고, 큰 시누는 내가 여태 만들어준 요리를 몇 가지 언급하며 칭찬을 마무리했다. 그리곤 모두가 흥미 있어할 법한 주제로 이야기 소재를 바꿔가며 편안한 식사 분위기를 유도했다. 나는 큰 시누가 참 좋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자 오랜만에 만난 어르신들은 무의식의 흐름대로 옛날 얘기, 어디 수술한 얘기, 누가 죽은 얘기 등을 이어가셨다. 우리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어르신들의 지인 이름이 계속해서 거론되고 죽어나가자 은근슬쩍 테이블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갔다. 명절날 어르신들의 핫 토픽은 사용하는 언어만 다를 뿐 한국이나 미국이나 내용이 똑같아서 속으로 웃음이 났다.


뭐라도 웃기다고 느낄 정신이 남아있는 건 그게 마지막 순간이었다. 5일째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 고장 난 나는 오토파일럿 모드로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사회적 동물로서 최소한의 표정 관리만 겨우 해내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속하게도 어르신들의 무의식의 흐름은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보통 식사가 끝나면 호박파이를 먹어야 집에 가는데 호박파이를 열 시가 되도록 먹지를 않는 것이다! 이제 오토파일럿도 고장 나고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서 목의 통증이 심해졌다. 부엌에는 대형 호박파이가 네 개나 대기 중이었다. 그걸 보자 내적 짜증은 폭증했다.


멜트다운 직전의 나는 남편을 살모시 불러 빨리 호박파이 먹는 분위기 조성하라고, 안 그러면 나 쓰러진다고 위협을 가했다. 오랜만에 가한 위협은 잘 먹혔다. 남편은 일단 알겠다며, 자기는 이 집에서 그럴 짬밥이 아니니 큰 누나에게 말해보겠다고 했다.


어르신들 테이블에서 젊은 세대 대표로 이야기에 참여 중이었던 큰누나는 남편의 호박파이 수신호를 감지하고 디저트를 먹자고 제안했고 어르신들 테이블에서는 드디어 우르르! 일어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호박파이 두 판을 다 먹었다. 이제 남은 음식 싸가는 의식만 남았다. 다행히 큰 두꺼비 이모님의 진두지휘 아래 이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는데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이 있었다.


우리 시어머님이 두꺼비 집안 욕심쟁이 담당이 아닌가 의혹이 드는 장면이었다. 다섯 가족이 참여했으면 5분의 1 정도를 자기 가족 몫으로 챙겨야 하거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거늘, 우리 시어머니는 욕심을 좀 부리셨다. 다른 두꺼비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매번 우리는 시댁에서만 땡스기빙을 했기에 처음 보는 풍경이었지만 내가 모르는 두꺼비 집안의 문화가 있겠지 했다. 우리 시어머니는 평소에는 욕심쟁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에 오니 나의 사회적 교류 배터리는 향후 한 달간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한없이 혼자 있고 싶고 우리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 그냥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멀리 부엌에서 나지막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남편이  이모네에서 가져온 음식을 락앤락에 담는 소리, 설거지 소리,  접시 정리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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