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 쪽 인사동 초입에
널따란 큰 돌이 있다.
거기 앉아 글을 자주 쓰곤했는데
그 돌 위에 앉아있으면
재밌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영하로 날씨가 내려간 날은
먹물이 모래 알갱이 처럼 얼기도 하고
은행나무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진 날은
꿈결에서 글씨를 쓰는 듯 했다.
길목이라 바람이 잦았는데
순간의 바람으로
글씨가 사방으로 날아갈때면
행인들은 마치 짜여진 플래시몹처럼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글씨들을
주워 주셨다.
참 감사했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한 스님 행색을 하신 분이
내 글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다.
그 돌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스님 차림을 한 일반인(aka.가짜스님)을 이미 워낙 많이 만난 터였다.
나는 이분은 또 무슨
도인 행세를 하려고 하시나 싶어
그저 글 쓰는데만 집중했다.
가짜 스님들은 말이 많은 편인데
이 분은 말이 없었다.
거의 30분 가까이 서서
아무말 없이 바라만 보시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 뭉탱이를 꺼내 돌 위에 조심스레 놓고
가시며 한 마디 하셨다.
"글씨에 내림이 있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이 뭔지 몰랐고
지금도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스님의 목소리에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저 문장은 내 심장부를 부드럽게 타격하며
내 팔식(八識)에 각인되었다.
나는 스님이 주신 돈으로 칼국수를 사먹고
뎁혀진 몸으로 문방사우를 짊어지고
안국역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