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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14. 2022

인사동 스님


안국역 쪽 인사동 초입에

널따란 큰 돌이 있다.

거기 앉아 글을 자주 쓰곤했는데


그 돌 위에 앉아있으면

재밌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영하로 날씨가 내려간 날은

먹물이 모래 알갱이 처럼 얼기도 하고

은행나무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진 날은

꿈결에서 글씨를 쓰는 듯 했다.


길목이라 바람이 잦았는데

순간의 바람으로

글씨가 사방으로 날아갈때면

행인들은 마치 짜여진 플래시몹처럼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글씨들을

주워 주셨다.


참 감사했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한 스님 행색을 하신 분이

내 글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다.


그 돌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스님 차림을 한 일반인(aka.가짜스님)을 이미 워낙 많이 만난 터였다.


나는 이분은 또 무슨

도인 행세를 하려고 하시나 싶어

그저 글 쓰는데만 집중했다.


가짜 스님들은 말이 많은 편인데

이 분은 말이 없었다.




거의 30분 가까이 서서

아무말 없이 바라만 보시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 뭉탱이를 꺼내 돌 위에 조심스레 놓고

가시며 한 마디 하셨다.


"글씨에 내림이 있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이 뭔지 몰랐고

지금도 무슨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스님의 목소리에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저 문장은 내 심장부를 부드럽게 타격하며

내 팔식(八識)에 각인되었다.


나는 스님이 주신 돈으로 칼국수를 사먹고

뎁혀진 몸으로 문방사우를 짊어지고

안국역 계단을 내려갔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다. 도덕경 발췌 (30cm X 28cm), 옥당지에 먹, ACCI CALLIGRAPH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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