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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15. 2022

인생 첫 공식 의뢰를 받다


대학생 시절

인사동 돌바닥 위에 앉아 있다 생긴 일이다.


나는 거기서 글씨를 쓰는 것도 재밌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물론 역경도 많았다.


유난히 무기력한 날이었는데

그런 날은 희한하게도

희한한 사람들이 다가와 나를 힘들게 했다.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하루 종일 지치고 우울한 기분에 갑자기 내가 지금 길바닥에 앉아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짐을 싸려던 찰나,


이 기분으로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아서

10분 동안 가만히 땅바닥을 바라보며

그날 하루를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제가 음반 하나를 제작중에 있는데,혹시 글씨를 써 주실 수 있을까요?"


"음반이요? 어떤 글씨가 필요하세요?"


"아, 앨범 전체 가사를 붓글씨로 써넣어볼까 구상중이거든요...작업량이 좀 될 텐데 혹시 참여 가능하실까요?"


어떤 음반인지, 가수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그는 어색한 웃음만 보일 뿐 묵묵부답이었다.


묵묵한 와중에도 왠지 모를 신뢰 가는 인상과 목소리에 나는 그가 건넨 명함을 살펴보았고, 살짝 흠칫했다.


"가능... 하실까요?"


처음 접해보는 규모의 작업에 속마음은 하고 싶으면서도 왠지 겁이 나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으나 내 입은 이미 대답을 하고 있었다.


"가사 작업만 하면 되는 거죠?"


"네. 역량 되시면 다른 자잘한 것들도 해 주시면 좋구요...혹시 사례비를 어느 정도 예상을 해야 할지..."


사례비라는 말에 내적 파도가 밀려왔다.


회사가 커 보이길래 나는 내가 아는 숫자 중 제법 큰 숫자를 불러보았다.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글과 영어를 섞은 나비체로 적어나갔는데, 오랜만에 세로로 적어나가는 작업인 데다 노래 한곡을 거의 다 적어나가다가도 줄이 좀 마음에 안 들거나 한 글자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적었다.


물론 업체에서 글자 한 톨 정도는 포토샵으로 수정 가능하지만 이미 쓴 글자에 두 번 손대고 싶지가 않았다. 어릴 적 나의 스승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한 자 한 자 평소보다 많은 글자를 집중해서 적어나가는 중에 나비체는 더 명확한 스타일로 자리 잡았고 이것으로 기회에 대한 감사함은 더 커졌다.


무사히 작업이 마무리되고 나는 내가 불렀던 제법 큰 숫자의 두 배를 입금받았다.




지금은 너무 커버린 그 회사의 아트디렉터로 아직 승승장구하고 계신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가끔 생각이 난다.


젠틀하면서 명철하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몇 달간 함께 작업을 진행하는 소통 과정에서 마찰이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의 내 인성을 감안하면 그분은 큰 인격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지누션 4집 '노라보세' 이미지 일부. 나는 글씨만 썼고 여타 디자인은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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