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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16. 2022

500명 소원 써주기 프로젝트


남편과 한참 싸돌아다니던 시절, 시댁이 미국인 우린 한국에 살 때도 겸사겸사 미국 여행을 자주 가곤 했다


자이언(Zion National Park)에서 요세미티로 넘어가는 길에 배가 고팠던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내려 맥도널드에 잠시 들렀다.


고속도로에서 내리니 휴대폰이 갑자기 터지면서 밀린 메시지와 이메일이 바바박 뜨기 시작했는데 반가운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이 와 있었다.


서울 모터쇼에서 독일계 자동차 회사의 이벤트 큐레이션을 맡았는데, 내가 평소에 하던 캘리그래피 스타일로 공간을 채우고, 사람들에게 글씨 써 주는 이벤트를 함께 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독일 친구와는 이미 여러 번 일을 해 본 터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케이했다 (국가별 스테레오타입 신봉자는 아니지만 독일 사람들은 내가 겪어 본 나라 중 아직도 가장 신뢰하는 자들이다).




귀국 후 현장에 도착하니 사전에 협의해 놓은 것 이상으로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메인 스크린과 키오스크에는 내가 작업하는 영상이 반복 스트리밍 되고 있었다.


하루에 3 세션으로 3일 간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세션 당 60명 정도가 몰렸으니 총 500명 이상의 소원을 들은 셈이다.


극적인 작업에도 불구하고 생전 첨 보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흥분과 감사를 자아내면서 서서히 나의 정신과 손은 예열에 들어갔다.


내가 글씨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옆에서 다섯 분 정도의 인원이 도와주셨는데, 그분들이 미리 줄 서서 기다리는 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마치고 소원을 글로 정리해 놓으면 나는 그것을 보고 글씨로 적어내면 되었다.


검은색 캔버스에 메탈릭 잉크 작업이라 낙관이 잘 묻어나지 않아서 매번 낙관을 찍을 때마다 체중을 실어 찍어야 찍혔다. 글씨 쓰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들었다.


정작 더 힘든 건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분들은 세션이 시작되기 한두 시간 전부터 줄을 스기 시작했고, 세션이 시작되어도 마지막 사람은 한 시간이나 더 걸려야 글씨를 받을 수 있었다.


신경을 안 쓰려해도 계속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여서 나는 최대한 몰입해서 빨리 써냈는데, 그런 마음 상태와 특정 행위 반복적 결합은 내 손에 특이점을 불러왔다. 새로운 손의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새로 나온 그 글씨의 움직임을 나머지 이틀 동안 계속해서 적용해 보면서 하나의 스타일로 고착화시켰고, 그것은 그 3일간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일정 온도와 압력.

물질의 변형과 새로운 창조에 필요한 물리 법칙이 글씨에도 오롯이 적용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원이 적힌 종이를 내게 건네주면서 대부분 조금씩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순간 그들이 몸만 어른인 일곱 살 어린이들로 보이면서 나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였다.


뭔가 애틋함 같은 것이 잔잔하게 밀려오는데, 다 큰 어른들의 일곱 살 어린이 표정은 순식간에 나도 일곱 살 어린이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소원대로 꼭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은 걸 참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마음을 휘리릭 글씨에 담았다.


하루 종일 그렇게 쓰다 마지막 글씨의 낙관을 찍고 나면 '하아-'하고 깊은 한숨이 나오면서 당장 침대에 뻗고 싶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3일 동안 500명의 소원을 들어버린 나는

당연히 몸져누웠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들의 소원을 다시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소원의 모양은 다 달랐지만

결국은 다 '사랑'으로 결부되었다.





애틋해서 (아빠체_thin), 3000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브런치북 아스팔트 우주에서 발췌




#캘리그래피 #accicalligraphy #박지영캘리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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