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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04. 2022

글씨를 쓰다 남의 벽에 '먹칠'을 해버렸다


여행을 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무작정 몇 달씩 살아보곤 했는데

그중에 가장 내가 사랑한 도시는

자그레브였다.


물론 도시가 예쁘기도 했지만

그곳 사람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예뻤다.


나는 옐라치차 광장에 앉아

밤이고 낮이고 글을 썼는데

하루에 많게는 서른 명,

적게는 한 두 명 정도와 교류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앉아있자니

그 동네의 오지랖 넓은 10명 정도와

친분이 생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10명은

나에게 100명을 데리고 왔다.


그 100명 중에 한 명이

루나였는데

크로아티아 그래피티 씬의

거물급 작가였다.


그가 하루는 자기 친구가

필라테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데

특이한 벽화 디자인을 찾고 있다며

나를 추천했으니 가보라고 했다.




나는 연장통을 들고 현장을 방문했다.

새하얀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크림슨 레드의 생명력 넘치는 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피오나 애플처럼 생긴

단단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간략히 작품 컨셉을 소개했는데

그녀는 자기 친구 루나의 취향을

절대 신뢰하기에 설명은 필요 없다고 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간 나는

첫 획을 벽에 긋는 순간 붓에 적절량 이상의

먹이 묻어 있음을 깨달았다.


가로획을 그었는데

너무 축축한 나머지 먹이 벽에 맺혀있다가 

세로줄이 몇 가닥 생겨버린 것이다.


순간, 돈보다 걱정이 되었던 것은

나를 믿어준 루나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써보았다.

차려지지 않았다.

다시 심호흡을 했다.


3분 정도가 지나자

나는 다시 진공상태가 되었고,

이내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머지 획들도 줄줄 흘려! 이것도 나름의 멋이 있잖아!'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줄줄 흘려가며 작품을 마무리했고

주인은 아주 흡족해하며

자기 친구 스튜디오에 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내 '줄줄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고압의 스트레스, 사람에 대한 고마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서로 줄줄이 엮여서

나는 내 안에 잠자던

줄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 원본이 죽어버린 맥북에 있어 화질이 구리다. '평안'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면 줄줄이를 볼 수 있다. ACCI CALLIGRAPH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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