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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06. 2022

뾰족한 나를 참아준 사람들


"이게 무슨 뜻인데?"


"진공청소기."


"미친 거 아냐?!

 나 너무 맘에 들어! 완전 멋져!"


루나는 빨간색 몰스킨 노트를 좋아해서 스케치 용도로 자주 사용했다. 그중에 자기가

가장 아끼는 노트 커버 속지에다 내 글씨를적어달라기에 나는 당시 좋아하던 단어인 '

진공청소기'를 적어줬다. 나는 그때 진공청소기의 '진공'과 '흡입'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런 글씨를 받았으니 내가 또 빚을 갚아야지! 오늘 자그레브 구석에 있는 폐공장에서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론칭 파티 있는데 같이 갈래? 너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옷 있어?

옛날 로고 말이야. 없으면 이보(루나 동생)한테 가지고 오라고 할게. 우리 집에 많아."




자그레브에서 만난 귀인 100 명은

크게 세 분류로 구분된다.


나 밥사 준 사람

같이 작업하고 일 소개해 준 사람

같이 놀러 다닌 사람


세 영역이 하나같이 다 소중하지만

루나는 저 세 가지를 나에게 패키지로 선사했다.


루나는 자그레브 서브컬처 씬의 주요 작가들을 내게 소개해 주었는데, 그의 동생 이보

또한 작가였다. 우리 셋은 뭉쳐 다니며 전시 오프닝을 함께 보고, 새벽 길거리를 함께 걸

으며 조잘조잘 얘기하고 많이 웃었다.




"행사 담당자가 옷 없으면 그냥 오래! 형 초대장 있지? 그거 보여주면 로고 박힌 마

스크 준데. 입장할 때만 잠깐 쓰면 될 거야."


이보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말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좋아할 만한 옷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보는 성품으로 따지면 형(루나)보다 한수 위의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형은 사람을 휘

어잡는 알파적(Alpha) 카리스마가 있는 반면 동생은 부드럽고 온화해 형보다 더 강했다. 결정적으로 형보다 웃겼다.


파티는 재밌었고 자그레브 젊은이들은 근사했다.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와 그냥

아디다스의 차이를 몰랐던 나는 그날 80년대 + 90년대 초반 유럽의 스트릿 아트 씬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새벽 2시쯤 체력이 고갈된 나는 이보에게 이제 집에 가자고, 형 좀 찾아오라고 했다.

우리 셋과 루나의 다른 친구 두 명은 루나 차에 구겨탄 채 음악 얘기를 시작했다.


루나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그림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국으

로 가기 전에 플레이리스트 정리해 놓은 것을 꼭 주고 싶다고 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괜찮은 셀랙션 같다며.


나는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벌써부터 듣고 싶지 않으니 닥치라고 점잖게 말했고,

이보는 옆에서 큭큭 웃었다.


살짝 마음의 상처를 입은 얼굴로 우리 집에 나를 내려 주며 루나는 말했다.


"우리 다음 주 토요일에 벽 하나 봐놓은 거 있는데 같이 할래? 내 친구 집이야."


"응 좋지!"




집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는데 내가 농담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루나의 마상 입은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나이 들어 생각할수록 무례하고 거칠었던 나와 놀아줬던 사람들이 사무치게 고맙다.

그들이 참아준 덕에 그나마 지금 정도의 사람 꼴이라도 갖추게 되었으니.


고맙다 (아빠_bleed) 1000 X 1000 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루나와 놀면서 만든것 중 하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만공선사의 시를 쓸 테니 너는 술 취한 고양이를 그리라고 했다. 삐딱한 고양이 뒷태가 관전포인트




#캘리그래피 #여행 #크로아티아 #accicall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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