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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08. 2022

티켓 없이 공연 보는 법


"내가 말했던 그 성가대 공연

오늘 저녁이야! 플라워 광장에서 만나자!"


"어. 비올 것 같아서 글씨 일찍 접었어.

이따 보자!"


당장이라도 물방울이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질 것 같은 하늘색에 나는 급히 문방사우를 정리하고 옐라치치 광장에서 집으로 향했다.


점심 즈음에 접는 일은 잘 없어서 대낮에 회색 빛 자그레브 대로를 걸어가는 발걸음이 낯설고 신선했다.




레오는

멋이라는 게 줄줄 흐르는 인간이었다.


그의 멋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는데, 굳이 말로 하자면 '멋'의 이데아가 질료를 통해 형상화된 것이 그였다.


그는 자그레브 클럽씬의 구루(Guru) 같은 존재였는데, 그를 통해 나는 자그레브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디제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레오의 친구 디제이들도 다들 선하고 빛나는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레오의 후광을 따라가진 못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입을 벌려 말할 때는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현전성(現前性)이 느껴지는 화법을 구사했다. 그런 사람을 평생 10 명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그는 자그레브의 모든 이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어딜 가나 환영받았다.


그는 나에게

이어폰에서 컴퓨터까지 모든 케이블 달린 물체의 케이블 감는 법, 예쁘고 질 좋은 옷 싸게 사서 오래 입는 법, 좋아하는 공연에 티켓이 없을 때 입장하는 법 따위를 자기만의 우아한 방식으로 가르쳐주었다.


그날은 좋아하는 공연에 티켓이 없을 때 입장하는 법을 배운 날이다.




어둑해진 저녁, 플라워 광장에 도착했다.


시력이 안 좋지만 귀찮아서 안경을 안 쓰고 다니는 나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레오가 와 있는지 이리저리 살피던 중, 날 보고 얼굴에 환한 조명을 켠 채 웃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 환한 웃음은

60%의 부성애와 40% 인류애로 구성되어 있어 왠지 모를 감동을 자아냈다.


그가 나를 대하는 방식과 흡사한 비율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하는 내가 혹시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부모의 잔소리와 비슷한 결을 지닌 숱한 조언을 해 주었고,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근처 도시 리예카(Rijeka)에 갔을 때도 그의 지인들로부터 유사한 보살핌을 받았다.


인류애가 메말라가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레오가 나에게 그날 플라워 광장에서 보여주었던 환한 미소를 떠올린다.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우리는 공연 시작 거의 직전에 도착했는데, 공연장은 이미 관중으로 꽉 찬 상태였다.

'여길 표 없이 들어간다고?' 속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올라오던 찰나, 레오가 말했다.


"지금부터 원하는 공연에 티켓 없이 입장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잘 봐!"


기대감에 차오른 나는 레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레오는 입구에  있는 행사 담당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크로아티아어로   없는  마디를 건네었고, 행사 담당자는 이내 미소 지으며 손짓으로 우리를 공연장 내부로 안내했다.


나는 신나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표정엔 평정심을 장착한 채, 티켓 있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들어가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착석과 함께 표정이 해제된 나는 레오에게 작게 소리쳤다.


"오 마이 갓! 너 방금 저 사람한테 뭐라 한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어 별거 아냐. 지금 그대로 똑같이 해볼게 잘 봐."


"어어!"


"우리는 이 공연을 보고 싶은데 표를 구하지 못했어요. 들어가도 되나요?"




마법 같았다.


레오가 내 눈을 쳐다보며 저 말을 하는데 내가 담당자라도 들여보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아... 저 말은 레오가 해서 먹힌 거구나. 말은 그냥 말일뿐, 준비물은 레오구나... 저게 통하려면 그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그 아우라라는 것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거구나...'


나는 욕심이 났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도 꼭 다음에 한번 써먹어봐. 알았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너의 요청에 아무렇지 않게 '오케이!'라고 할 거야! 물론 노력했는데도 구하지 못했을 때에 한해서만 써먹어야 해!"





레오 보살님 Bodhisattva Zagrebačka Leo (그래피티체_inkbleed) 1000X1000 px, Procreate, ACCI CALLIGRAPH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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