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했던 그 성가대 공연
오늘 저녁이야! 플라워 광장에서 만나자!"
"어. 비올 것 같아서 글씨 일찍 접었어.
이따 보자!"
당장이라도 물방울이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질 것 같은 하늘색에 나는 급히 문방사우를 정리하고 옐라치치 광장에서 집으로 향했다.
점심 즈음에 접는 일은 잘 없어서 대낮에 회색 빛 자그레브 대로를 걸어가는 발걸음이 낯설고 신선했다.
레오는
멋이라는 게 줄줄 흐르는 인간이었다.
그의 멋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는데, 굳이 말로 하자면 '멋'의 이데아가 질료를 통해 형상화된 것이 그였다.
그는 자그레브 클럽씬의 구루(Guru) 같은 존재였는데, 그를 통해 나는 자그레브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디제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레오의 친구 디제이들도 다들 선하고 빛나는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레오의 후광을 따라가진 못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입을 벌려 말할 때는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현전성(現前性)이 느껴지는 화법을 구사했다. 그런 사람을 평생 10 명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그는 자그레브의 모든 이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어딜 가나 환영받았다.
그는 나에게
이어폰에서 컴퓨터까지 모든 케이블 달린 물체의 케이블 감는 법, 예쁘고 질 좋은 옷 싸게 사서 오래 입는 법, 좋아하는 공연에 티켓이 없을 때 입장하는 법 따위를 자기만의 우아한 방식으로 가르쳐주었다.
그날은 좋아하는 공연에 티켓이 없을 때 입장하는 법을 배운 날이다.
어둑해진 저녁, 플라워 광장에 도착했다.
시력이 안 좋지만 귀찮아서 안경을 안 쓰고 다니는 나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레오가 와 있는지 이리저리 살피던 중, 날 보고 얼굴에 환한 조명을 켠 채 웃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 환한 웃음은
60%의 부성애와 40% 인류애로 구성되어 있어 왠지 모를 감동을 자아냈다.
그가 나를 대하는 방식과 흡사한 비율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하는 내가 혹시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부모의 잔소리와 비슷한 결을 지닌 숱한 조언을 해 주었고,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근처 도시 리예카(Rijeka)에 갔을 때도 그의 지인들로부터 유사한 보살핌을 받았다.
인류애가 메말라가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레오가 나에게 그날 플라워 광장에서 보여주었던 환한 미소를 떠올린다.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우리는 공연 시작 거의 직전에 도착했는데, 공연장은 이미 관중으로 꽉 찬 상태였다.
'여길 표 없이 들어간다고?' 속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올라오던 찰나, 레오가 말했다.
"지금부터 원하는 공연에 티켓 없이 입장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잘 봐!"
기대감에 차오른 나는 레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레오는 입구에 서 있는 행사 담당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크로아티아어로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건네었고, 행사 담당자는 이내 미소 지으며 손짓으로 우리를 공연장 내부로 안내했다.
나는 신나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표정엔 평정심을 장착한 채, 티켓 있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들어가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착석과 함께 표정이 해제된 나는 레오에게 작게 소리쳤다.
"오 마이 갓! 너 방금 저 사람한테 뭐라 한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어 별거 아냐. 지금 그대로 똑같이 해볼게 잘 봐."
"어어!"
"우리는 이 공연을 보고 싶은데 표를 구하지 못했어요. 들어가도 되나요?"
마법 같았다.
레오가 내 눈을 쳐다보며 저 말을 하는데 내가 담당자라도 들여보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아... 저 말은 레오가 해서 먹힌 거구나. 말은 그냥 말일뿐, 준비물은 레오구나... 저게 통하려면 그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그 아우라라는 것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거구나...'
나는 욕심이 났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도 꼭 다음에 한번 써먹어봐. 알았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너의 요청에 아무렇지 않게 '오케이!'라고 할 거야! 물론 노력했는데도 구하지 못했을 때에 한해서만 써먹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