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CCI Dec 19. 2022

요세미티에서 컵라면을 먹으면

근사한 일이 벌어진다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서 '요세미티(Yosemite)'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다.

발음이 웃기다고 생각했던 기억이다.

 

세계지리 시간인지 과학 시간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요르드 지형 어쩌고...그냥 물 말고 빙하가 화강암을 침식시키면서 U자 계곡 형성 어쩌고 하여 만들어졌다는 곳이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한국식 주입식 교육의 유용함과 의미 있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때 주입당한 덕에 그저 놀러 왔을 뿐인데 요세미티 밸리가 왜 U자 형인지 알지 않는가! 


아마 오늘 거기서 단체사진 찍고 간 각국 사람들 중에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이걸 상식으로 아는 사람들은 극동아시아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물론 '그런 거 알아 뭐하나, 풍경은 느끼면 그만이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어떤 것의 기원을 알게 되면 그것과 한층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듯한 느낌이 좋아서 굳이 알아보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사람, 사물, 국가, 예외 없이 다 적용된다.


미국 땅에는 우리가 세계지리 시간에 표본으로 보고 배운 샘플들이 널려있었고, 남편과 여행할 때마다 잘난 척할 기회가 자주 펼쳐졌다. 입을 다물고 있고 싶어도 세계지리 시간에 본 게 눈앞에 나타나는데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때마다 나는 '한국 사람은 이 정도는 기본값이다. 개인대 개인으로 붙으면 미국 사람들은 한국 따라오려면 멀었다.'로 마무리 짓곤 했다.


빙하의 침식으로 형성된 U자 계곡 요세미티 밸리에서 오늘 아침 일출. 왼손으로 만지고 있는 돌산이 El Capitan, 정수리 위에 뾰족한 포인트가 Half Dome.


엘 캐피탄(El Capitan)은 캘리포니아 출신 세계적 클라이머 알렉스 호널드가 몸에 아무런 안전장치를 하지 않은 채 맨 손으로 꼭대기까지 올라가서(Free soloing, 클라이밍 방식 중 하나) 더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하프돔(Half Dome)은 노스페이스(North Face) 회사가 로고를 디자인할 때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사진으로는 심도(Depth of Field)를 전혀 구현할 수 없지만 실제로 보면 난생처음 보는 풍경의 깊이감에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상태가 된다. 예쁘다거나 멋지다거나 이런 말이 나오지 않고 그저 입을 한 없이 다물고 싶어 지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보면 이 모든 신성한 자극을 처리해내느라 육신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가 되는데 그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남편은 보온병과 컵라면을 들고 온다.


관광지 핫스팟에서 컵라면 먹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나는 남편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며, 저 밑에 평지에 내려가서 조용히 먹자고 제안한다.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요세미티 계곡은 또 다른 맛이 있다.


태초의 순수함을 간직한 차가운 공기를 반찬으로 한 젓가락씩 후루룩 들이킬 때마다 온 몸의 세포가 환호하고 국물로 '크합~' 마무리하며 트랜스 상태에 들어간다.


요세미티에서 컵라면을 먹으면 이런 근사한 일이 일어난다.




너무 맛있었기에 한번 더 정식으로 올려본다.




위 작품에서 This는 요세미티, That은 컵라면 Wow는 와우다. This That Wow 폼보드에 아크릴 물감, 2017 ACCI CALLIGRAPHY


*눈 속에서 8마일 하이킹 후 탈진상태에서 적은 글이라 매우 무의식의 흐름이지만 현장감을 전달 드리는 것에 만족하며 일단 올려봅니다!




#요세미티 #하프돔 #미국여행 #로드트립

작가의 이전글 지구에 나만 홀로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