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중 2병'이라는 단어의 유행이 지나고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즈음엔 '대 2병'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진로를 일찍 정하고 대학을 온 학생들이 유독 뒤늦은 진로의 고민과 질풍노도의 혼돈 속에서 전과, 자퇴, 취업 등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보통 대학교 2학년 즈음에 온다고 해서 '대 2병'이다. 나도 중 1, 2학년 때 일찍 진로를 결정하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 케이스였기 때문에 대 2병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때쯤이 되어서야 내 맹목적이었던 심리학에 대한 짝사랑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나는 심리학을 하고 싶은 것이 맞나? 나는 심리학을 좋아하나? 내가 이 길로 먹고살 수 있을까? 취업 준비의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흔히들 많이 하는 고민을 나도 했다.
그 무렵의 나는 사회학과의 강의들에 심취해 있었다. 사회학의 모든 것을 해체하고 새로이 다시 들여다보는 관점은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했고 학구열이 높았던 나를 매료시켰다. 교직이수를 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도, 진지하게 복수전공을 고민했다. 치열하게 공부해 가며 4학기를 마치고 맞은 겨울방학. 그때만 해도 나는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다. 공부가 재밌었고, 진로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행복한 고민이었으며, 학자금 대출에 대한 걱정도 없었고,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살던 자취방은 고시원만큼 좁아도 좋았다. 팍팍하던 인생에 꽃물이 들고 조금 배부르고 등 따수워지자 인간은 안일해졌다. 수능 끝나면 다들 한 번쯤 하던 쌍꺼풀 수술이나 라식, 라섹 그런 것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남은 내 인생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진 전혀 모른 채.
엄마는 성미가 급하고 성마른 사람이라서 한 번 시작한 일은 순식간에 끝마쳐야 직성이 풀린다. 나도 좀 그런 면이 있는데, 문제는 엄마가 딸의 의료적 측면에서도 그 성미 급함을 발동시켰다는 것이다. 나는 고근시와 고난시를 갖고 있었기에, 대구의 유명 안과는-라식, 라섹 등의 수술로 유명한-내 눈이 수술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시력 교정술은 사전에 안과를 여러 곳 다니며 검사를 많이 받아보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검사 후 본 병원에서 바로 수술을 하면 검사비를 깎아준다는 말에 혹해서 냅다 수술 일정을 잡았다. 내 기억엔 며칠도 채 안 걸려서, 거의 당일날 수술을 했던 것 같다.
라섹 전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나는 불안감에 떨었다. 엄마. 나 이거 하기 싫어요. 무서워요. 못할 것 같아요. 불도저 같은 우리 어머님은 이미 돈을 지불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 손은 이후 1년을 꼬박 넘게, 병원을 오가며 눈을 감고 다니는 나를 그나마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손이 되었다.
처음엔 그냥 라섹이니까 많이 아픈 줄 알았다. 다신 이런 거 안 할 거라며 엉엉 우는 나를 엄마가 달랬다. 그 후 곧 명절이었어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로 외갓집을 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수술 회복기인 줄 알았다.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있던 내게 이모가 오셔서 불을 켰을 때,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불 켜지 마세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각막의 통증. 계속 메마르는 눈. 분명 2주가 지나면 보호렌즈를 뺀다고 했는데 보호렌즈를 빼기만 하면 아파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고 고통의 눈물이 줄줄 흘렀다. 상황이 이상했다. 영문을 모른 채 여기저기 대학병원에 끌려갔다. 어떤 병원에선 마취약만 넣어주고 보호렌즈를 빼버리라고도 했고, 어떤 병원에선 잘못하면 각막이 다 벗겨지니 보호렌즈를 꼭 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6~8개월이 지나고서야 보호렌즈를 뺄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엄마와의 갈등은 극에 달해있었다. 엄마는 네가 하자고 한 수술을 왜 내 탓하냐며 소리를 질렀고, 불을 다 끄고 암막커튼을 친 방 안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생활하는 네게 너만 힘드냐고 원망했다. 나는 전화기 너머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만, 그만해 주세요. 죄송해요. 엄마는 본가에 올 테냐는 제안을 잠깐 했지만, 아빠에 더해 내 수발까지 들게 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제안은 한 번으로 끝이었다. 그 뒤 1년을 나는 오롯이 혼자 감당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눈에 통증이 오는 상태에서 배는 고프다고 꼬르륵대는 게 지겨웠다.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능은 처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놀랍다. 어떻게 그 고립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지.
한 번은 내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먹으려고 더듬거리며 면을 끓이고 있었다. 실눈을 아주 조금씩 떠가며 식사를 준비하던 그때, 김가루를 뿌려놓은 스뎅 그릇이 엎어졌다. 카당탕, 캉. 나는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내 발 밑이 처참할 것이라는 것을.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울지 않아도 늘 눈은 아팠기 때문에, 울면 눈이 부어서 더 아프다는 이유로 내내 꾹꾹 참아왔던 눈물이었다. 홧덩어리가 목과 명치 사이에 꽉 막혀 오르내렸고, 그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없었다. 그날은 눈 옆 살결이 째지도록 울었다.
그때 나의 하루 일과는 이런 식이었다. 아픈 몸이 알아서 회복하려는 듯 잠이 쏟아진다. 비몽사몽 하게 일어나면 눈치도 없이 배가 고프다. 이런 상황에서도 밥이 입에 들어가냐는 자기혐오가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일단 식사 준비를 한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하는 일은 하루종일 라디오 듣기. 라디오를 듣다 듣다 2년, 3년 전 다시 듣기까지 들었던 것 같다. 눈이 너무 아프면 찜질을 하고 진통제를 삼키면서 속삭였다.
'괜찮다. 괜찮을 거야. 나을 수 있어. 희망을 가져. 그래야 살 수 있어.'
내가 눈을 뜨지 못하게 된 이유는 원인 불명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영원히 눈을 못 뜰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나는 무너졌다. 선생님. 저 고작 21살인데. 앞으로 어떡해요? 저는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이제야 막 행복해지기 시작했어요. 짧은 생 평생을 지옥 속에 살다가 이제야 좀 숨통 트였더니 눈을 앗아가는 게, 이게 신의 일인가요? 저는 저주받았나요?
대학교 4년을 스트레이트로 졸업하는 게 목표였으며, 임용고시도 준비해 보고 석사를 입학해서 사설 상담센터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라포 형성인데, 내담자를 바라보지 않고 비언어적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떻게 관계가 형성된단 말인가. 애초에 선글라스와 선캡, 양산을 장비하고서야 밖에 나갈 수 있는 나로서는 복학조차 꿈꿀 수 없었다. 인생 계획이라는 게 있었다면, 적어도 버킷리스트 정도는 있었는데 눈이 없는 나는 집 앞 도로에만 나가도 빵빵거리는 차 경적 소리에 놀라기 일쑤였다. 한 번은 실눈을 떠가며 횡단보도까지 가서, 초록불일 때는 잠시 편하게 눈을 감고 건너도 되겠지 했는데 내 발 바로 앞으로 오토바이가 쌩 지나가 치일 뻔한 적이 있다. 이 나라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그 어떤 배려도 없었다. 차도와 인도가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 길 양 옆에 불법주차를 다 해놓아 사람이 지나갈 틈도 없었다. 애초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서 교육받아본 게 아닌 나는 지팡이 쓰는 법도 몰랐다. 그저 무력하게 장우산만 휘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인생을 바라볼 때의 초점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삶'이 중심이다. 무엇이 됐든 뭐가 힘들든 사는 건 당연하고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두 눈을 맨 손으로 뽑아내고 죽어버리고 싶어 졌을 즈음에는, 내 인생의 초점은 '죽음'이었다. 죽음의 사신은 이전보다 훨씬 가까이 와서 내 곁에 늘 머무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머릿속에 사는 것 같았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살았다. 죽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만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살고 싶어서 매일 밤 인형을 쓰다듬으며 꼭 나을 거라고 나 스스로를 달랬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평생을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우울증이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건.
나의 암흑기였던 그 1년은 오직 '생존'에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아프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였다. 유인원이 된 것 같았다.
1년의 휴학 후 간신히 복학했지만 처음부터 난제였다.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해야 했고, 학부생들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수업을 겨우 듣고 나면 이후 공부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눈이 아파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대개의 강의식 수업은 프롬프터를 이용하고, 그것은 나에게 매우 밝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빛을 남들보다몇 배는 밝게 느끼는 광과민증이 되어 있었다. 교실의 조명도, 한여름의 햇빛도, 나에겐 고역이었다. 너무 밝았다. 이렇게 환한 세상에 나만 까만 기분이었다. 검게 지워진 나. 먹물처럼 물들어 꾸역꾸역 기어 다니는 나. 양산을 보고 "비가 오나?"라던가 선캡과 선글라스를 보고 "그렇게 눈이 부신가?" 하는 말을 던지며 지나가는 태평한 사람들 모두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대학의 학생상담센터를 찾았다. 선생님들은 내가 우울증에 안 걸리는 게 이상한 수준이라고 했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불쌍한 인생도 있구나. 그런 내가 심리학과라는 게 웃겼고, 심리학자와 상담가를 꿈꾼다는 게 주제넘어 보였다. 그때부터 4학년 졸업반, 취준생까지 내 눈은 놀랍게도 아주 조금씩 나아졌지만, 여전히 마땅한 치료법은 없었다. 진통제로 복용하던 신경계 약의 부작용으로 우울이 심해졌다. 서울까지 병원을 오가면서 피로도는 높았고, 평생 나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여전했다. 나는 취업 전까지 계속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고, 지금도 평상시에는 종종 끼고 다닌다.
이 점을 좋게 생각해보려고 한 적도 있다.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집단상담을 기획하면서, 아들러의 열등감을 주제로 가져와서 선생님은 이런 신체적 결함이 있어도 열등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아요, 하고 떠벌렸다. 사실은 희망사항이었다. 여전히 학교 관리자분 앞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는 것은 무서웠으며,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일했다. 결국 2주 간의 교생실습-코로나 때였다-마지막 날 나는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져서 따로 맞춘 색안경을 끼고 일을 한다. 하루 생활을 할 때도 대개 집 안에서는 안경을 안 쓰거나, 색안경을 쓴다. 물론 한여름에 밖에 나갈 땐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다. 원인 모를 눈의 상처는 오랜 시간을 지나고 지나 점점 완화되었지만, 그로 인해 무너진 내 마음은 여전히 재건 중이다. 내가 이 경험에서 느낀 건 두 가지다. 아무리 수술의 부작용 확률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게 일어나면 100%라는 것. 그리고 인생사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 덧붙이자면, 그래도 인생은 늘 어찌어찌 살아진다는 것.
어둠 속의 1년을 보내며 나는 너무 비참했고, 고독했고, 외로웠으며 아팠지만 현재의 나는 다시 사회생활에 잘 복귀하여 적응하고 있다. 비록 그 이후에 심해진 우울증으로 인한 일들을 또 설명하겠지만, 어쨌든 당장 눈알을 뽑고 죽고 싶은 상태는 아니니까 그럭저럭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엔 신체적 고통도 문제였지만 이를 도와줄 심리적 지지 자원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위험 그 자체였다. 부모님은 당연히 내게 걱정 어린 사랑을 보낼 리 없으시고, 그나마 대학에 가서 만들었던 친구들은 내가 휴학을 하고 아파하는 꼴을 몇 번 보더니 금방 사라져 버렸다. 자기네 인생만 해도 골치 아픈데 누가 생판 모르는 남의 희귀병까지 떠안고 싶겠는가. 당시는 복지센터에 도움을 요청할 상황조차 안 되었기에 그야말로 고독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하와이로 유학을 갔다가 혼자 외로움을 겪으며 향수병을 앓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나와 비슷한 시기에 스트레스라는 만병의 근원으로 또 다른 희귀병을 앓게 된 친구에게 연락해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내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난 그게 너무 괴로웠다. 엄마 아빠로부터 기인한 내 어그러진 대인관계 방식이 여기서 다 탄로 나는 것 같았다.
요즘엔 1인가구가 늘어가면서 젊은 층의 고립된 자살이 사회 이슈이다.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이것을 막으려면 조금만 신경 써주면 된다. 주변에 혼자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괜찮은지, 잘 지내고 있는지 자주 안부를 물어주는 것. 그뿐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사회 복지기관에 연계해 주는 것. 그것이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지역사회 및 국가에서는 각종 사회복지 전문가들,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그들에게 매칭해 주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심리사회적 지지 자원이 되어 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 그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 각개전투하여 생존하는 사회라지만 실제로 혼자 살아남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인간에게 다른 인간의 따스함과 손길은 중요하다. 고통에 놓인 개인에게 심리적 지지 자원-내적인 것도 포함한다-이 충분할 때와, 그렇지 않은 경우 회복탄력성은 크게 달라진다. 내담자들에게 설명할 때 흔히 기울어진 에펠탑을 예시로 드는데, 에펠탑이 기울어진 상태로 혼자 버텨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무너지는 속도는 빠를 것이다. 그러니 지지대를 하나씩 놓아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 지지대 하나하나가 바로 여러분들의 친구, 가족, 그리고 사회-에서 제공하는 복지와 심리치료 및 의료 서비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때로는 내가 지지대가 되어 줄수도, 내가 에펠탑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에펠탑으로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에 환원하길 바란다. 반대로 내가 지지대였다면, 그만큼 그대가 휘청일 때 많은 이들이 그대를 도와주려 나설 것이다.
물론 이 각박한 사회에서 1:1 대응 방식으로 네가 도와주면 나도 도와주고, 이런 게 안 될 수도 있다. 그럴 땐 거리낌 없이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나 본인이 소속된 기관의 복지센터를 찾아 나서길 바란다. 그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 모든 방편을 써서 그대를 도와주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극한의 상황을 경험했기에, 나처럼 고립될 위기에 놓인 누군가에게 정신건강 전문가로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다. 궁금한 부분이나 필요하신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