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확인했듯 엄마는 내게 양가적인 존재였다면 아빠는 그저, 공포 그 자체였다. 고등학생 시절, 위클래스 선생님의 도움으로 가정폭력상담센터 소장님께 상담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가족 구성원을 한 명씩 동물에 빗대어 표현하게 하셨고, 나는 아빠를 야생곰이라고 말했다. 취준생이 되고 또 다른 상담을 받을 때, 가족 구성원을 동물과 색깔에 비유해 보는 작업을 했다. 내게 아빠는 여전히 야생곰이었고, 검은색이었다.아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글을 쓰려는 지금도 나는 두렵다. 키 184, 100kg가 넘는 체구의 성인 남성 앞에서, 딸이지만 딸로 취급되지 못한 작은 여자아이는 움츠러들어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학교 교사였다. 중고등학생 즈음 되고서야 알았지만, 학교에서는 꽤나 인기도 있고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이미지를 만든 모양이었다. 아는 선배를 통해 전해 들은 아빠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사람이 안 무섭다고? 그 사람이 친절하다고? 그 사람이 좋다고? 그 사람이, 학생들을 안 때린다고?
그리고 곧바로 찾아드는 감정은 억울함이다. 우리는 아들 딸인데도 왜 그렇게 맞지? 우리는 자식인데 어떻게 다정한 눈길 한 번조차 못 받지? 왜 나는, 술 취한 엄마의 입을 통해 "내 남편은 애들을 자식으로 안 여긴다. 자긴 나뿐이란다."라는 자랑 같던 말을 들어야 했지?
그러고 나서 밀려드는 감정은 체념. 그래. 아빤 원래 그랬지. 거실 중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집안의 분위기를 묵직하고 살벌하게 만드는 사람. 밖에선 사람 좋은 척하다가 집에 와서 아내와 자식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가정폭력범. 그렇게 때리고 부숴놓고 다 망가져서 죽기 직전 울부짖었더니, 자긴 그런 적 없다는. 그런 사람.
대학 졸업 즈음 처음 본격적으로 상담을 받았을 때의 선생님은, 엄마에게 받은 상처는 어떻게 상담을 통해 풀어가 보겠는데 아빠는 이미지, 심상이 너무 안 좋아서 차마 지금 건드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2년 여의 시간이 흐르고 곧 시작될 상담에서는, 선생님께서 아빠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엄마와의 관계나 기억, 상처들은 지난 글을 통해 봤듯이 대개 정리가 되었으나 아빠가 압도적으로 존재하는 기억들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겨진 상태다. 2년쯤 전에 상담사님과의 라포-상담자와 내담자의 치료적 관계-가 매우안정적이고 좋을 때 아빠에 관한 기억을 한 번 꺼냈다가, 내가 너무 압도되어 과호흡이 와 선생님께서 다급히 나를 안정시킨 적도 있다.
그래서 대체 아빠가 뭘 했길래 내가 이렇게까지 공포에 떠는가. 몇 가지 예시만 들어보도록 하겠다. 앞으로의 서술은 내가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것 그대로의 경험이지만 상당히 잔인하고 비극적일 수 있기에,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넘어가시길 추천드린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두 살 위 오빠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였다. 그때 우리는 시력이 나빠서 '드림렌즈'라는 걸 꼈었다. 잘 때 렌즈를 꼈다가 아침에 빼면 시력이 하루 정도 좋아지는 건데, 한 쌍에 백만 원이나 해서 엄마가 절대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혼날 거라고 강조해 뒀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출장을 가고 집에는 아빠만 있던 밤. 오빠는 드림렌즈를 차마 눈에 넣지 못하고 어물쩍대고 있었다. 아빠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고, 마침내 오빠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다가 눈에서 렌즈가 빠졌는데 실수로 그걸 몸으로 눌렀던지, 그만 렌즈가 깨진 것이다. 부모님께 들키면 크게 혼나고 맞을 거란 생각에 오빠는 렌즈를 테이프로 붙였고, 그걸 차마 눈에 넣지 못한 것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빠는 주방 식탁에 있던 오빠를 불러냈다. 그리고 타격음이 시작되었다. 크고 단단한 주먹이 여린 살과 덜 자란 뼈에 부딪히는 소리, 어린아이의 새된 비명소리. 나는 그 속에서 차마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주방 식탁에 그대로 앉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오빠가 죽지만 않게 해 주세요. 제발요.'
또 다른 날. 아빠는 늘 그렇듯 퇴근을 하고 입었던 옷을 모두 엄마에게 넘겼다. 아빠는 결벽증이 심해서, 집 바깥의 모든 것은 바이러스로 가득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바깥에 나갔다 왔던 아빠가 서있는 현관 쪽, 더불어 우리 남매의 방문이 있는 모든 구역은 '더러운 곳, 밟아서는 안 되는 곳'이 된다. 아빠가 샤워하러 들어가시고 엄마가 모든 곳을 박박 닦기 전까진 말이다.
그러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하필 그때 대변이 급했다. 한두 번은 아빠가 심기불편한 모습으로 화장실을 가게 허락해 주었다. 그게 세 번쯤 이어지던 날, 아빠는 버럭 화를 냈다. 저 년이 나를 괴롭히려고 꼭 내가 올 때만 화장실을 간다고. 절대 화장실에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나는 바싹 겁에 질려 내 방 침대 맡에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이 노래지고 기절할 것 같아도 대변을 참아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치질을 겪었다.
소변보는 일도 마찬가지로 공포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화장실을 가야 했기에, 어린 나는 도저히 못 참고 쿠션에 수건을 깔아 볼 일을 봤다. 그때의 수치스럽고 복잡하던 감각은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명백한 아동학대이다. 그러나 아빠는 성인이 된 내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자 극렬히 부정했다(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와 직접 대화를 하지 않고 엄마를 통해 이야기했다. 정확하게는 무서워서 직접 대화하지 못했다.). 자기가 언제 화장실도 못 가게 했느냐고. 다 보내줬다고. 역시나 가해자는 다 잊고 발 뻗고 잘 살지만 피해자는 생생히 그대로 기억하는 법이다.
요즘에서야 한국에 많이 알려졌지만, 양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양육은 엄마만이 모성애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 공동의 몫이다. 아빠는 성인 남성으로서 양육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엄마와 마찬가지로 주양육자가 될 수 있다. 되어야 한다. 엄마가 자녀의 마음속에 여성상을 만들어주듯이, 아빠는 자녀에게 남성상, 그리고 아버지상을 제대로 만들어 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가부장제.
끔찍하고 이기적이며 오롯이 권력과 지배로 형성된 그것. 가장인 남성이 가정을 지배하고,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멋대로 굴리든지 그건 가족의 몫이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는 아주 안일하고 폭력적인 체계.
이것 덕분에 그동안 많은 가정폭력이 묵인되어 왔다. 상담자로서 청소년들을 상담해 보면, 현재 고등학생인 아이들의 경우 중학교 때까지나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 맞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여전히, 2023년인 아직도 말이다.
오은영 박사님의 각종 프로그램과 강연, 책 덕분에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여전히 모르는 분들도 많은 사실이 있다. 아이에게 폭력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이다. 어느 학교에서 신입 교사분들을 모아놓고 자살 예방 교육을 한 적이 있는데, 잠시 쉬는 시간이 생기자 "애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그 학교가 남고였으니 교사분들의 고충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그러나 상담사로서, 또한 가정폭력의 희생자로서 그건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도 "애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계셨다. 가부장제의 권위와 위계질서, 폭력 속에서 아빠는 엄마와 우리를 때렸고 엄마는 우리를 때렸으며, 오빠는 나를 때렸다. 폭력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부모에게서 문제해결방식을 폭력밖에 배우지 못한 아들은 자신의 여동생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결국 막내였던 나는 모든 걸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어릴 때부터 이루어진 폭력과 강압적인 권위에 의해 비틀려 자라난 우리 오빠는 성에 일찍 눈을 떴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 나를 추행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재미있게 놀아주던 오빠가 언제부턴가 나를 '포르노에 나오는 여성'을 보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나는 이 집안에서 모든 것을 잃었음을 직감했다.
그나마 나의 편이었던 오빠는 중학생 때 학교에서 자살 시도를 했고, 조울증과 간헐적 폭발 장애 진단을 받았으며, 쉽게 말하면 마동석한테도 화내는 '진짜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사회생활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막노동을 하며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나는 사춘기를 보내며 친족성폭력을 다수 겪고 그렇게 오빠와는 멀어졌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다양한 사람들일 것이다. 여성일 수도, 남성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자녀일 수도, 부모일 수도 있다. 자. 이 파탄난 한 가정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가? 피해 당사자인 나는, 결국 근본적 원인은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인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아빠는 우리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고, 오빠는 나를 '여성'으로 보고 멋대로 유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정폭력과 친족성폭력의 피해자이자 생존자가 되었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났었다. 권력과 위계질서 속에서 성 피해를 입은 많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결국 이 가정 속에서 살아남았고, 심지어 사촌 남동생에게도 친족성폭력을 당했지만-이 일은 추후에 설명하겠다-어쨌든 살아남아 이야기하고 있다. 이야기를 해야만 사람들은 안다. 세상에 이런 가정도 있었느냐고, 끔찍하다고. 왜 진작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냐고. 정작 우리 엄마는 그런 말을 했었다.
"딴 집 애들한테 물어봐라. 이 정도는 다 맞고 산다."
명언이었다. 반쯤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만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옳은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동청소년의 심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단 하나도 동의할 수 없는 것,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아동청소년에 대한 폭력이다.
그러나 여전히 경찰에 신고를 해도, 국가에 도움을 요청해도 많은 아이들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위클래스와 위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학교밖청소년을 위한 센터도 있지만, 아이들은 그런 게 있는지 미처 알기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폭력을 당하고 만다.
이 글에서는 부모님들께 한 마디, 자녀들께 한 마디 남기고 마치도록 하겠다. 부모든 자녀이든, 가정폭력과 관계되어 있다면 신체심리학 책인 <당신의 어린 시절이 울고 있다>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당신이 때렸던 것, 맞았던 것 모두는 기억에 남지 않아도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진다. 그래서 끝내는 아동청소년을 위험한 절벽으로 내몬다. 내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면 꼭 참조하길 권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피해를 당한 자녀들에게. 그대들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부모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팔자, 그뿐이겠지요. 마음껏 미워하고 원망하세요. 어린 그대에게 세계 그 자체였던 부모의 폭력은, 그 어떤 말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아동학대가 맞습니다. 내가 그 상처를 겪었고, 여지껏 그 기억에 시달리며 쪼그라들어 있다면, 저처럼 글로 풀어내보세요. 세상에 소리쳐 보세요. 나 이런 일을 당했어요. 나는 피해를 입었는데 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억울해요, 하고요. 그리고 연대합시다. 피해당사자들끼리 뭉치고 힘을 모아, 사회를 바꿔나갑시다. 폭력과 힘으로 물든 이 사회를 언젠가는 바꿀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래서 드디어 언젠가는 대한민국이 아이 낳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리라 믿으며, 글을 끝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