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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두건 Jul 20. 2023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나는 죽고 싶어진다.


 상담실에 가서 과거 이야기를 되돌아보기 시작하려면, 대체로 생애 초기 기억부터 시작한다. 학사 시절 전공 중 '상담심리'를 처음 배웠을 때 가장 첫 과제가 '생애초기 기억 떠올리기'였던 것이 생각난다. 


 나의 생애 초기, 즉 내가 기억하는 모든 사건 중 가장 첫 기억은 뭘까. 다른 조원은 자신이 1살일 때마저 기억난다며 떠드는데 나 혼자 묵묵했다. 그 시절의 나는 과거가 거의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및 그 딸이 정리한 방어기제 중 '억압'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억압을 아주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유치원생 이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고, 그나마 남은 기억은 유치원생인지 초등 저학년이었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두고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 좋은 기억들, 기억해뒀다 뭐하니. 그냥 잊어."


 억압이란 방어기제는 무의식이 충동이나 욕구, 불유쾌한 사건을 무의식적으로 눌러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어린시절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기에 억압이 발동하지 않았나 싶다. 그나마 유치원생 때였을 것이라 추측되는 기억은 딱 3가지다.  첫 번째 기억은 유치원에서-가톨릭 유치원이어서 수녀님들이 계셨다- 새치기를 한 친구를 밀쳤다가 나만 반 밖으로 내쫓겨서 문을 두드리며 엉엉 운 기억이었고, 두 번째 기억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유치원 행사 때 만든 얼굴모양 뻥튀기를 들고 차 뒷자석에 앉아 그것을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내려다보던 기억이다. 왜 싱숭생숭했냐 하면, 그때도 나의 아버지는 누워서 아내와 어린 자식들에게 물을 떠오라 시키는 사람이었고 그런 분이 나와 행사를 함께 해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사에 아버지가 오셨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얼굴 뻥튀기를 나름 소중하고 애틋하게, 그러나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바라봤었다.

 마지막 세 번째 기억은 비가 내리던 날 차 안이다. 어린 나를 외할아버지께서 무릎에 앉혀놓으시고, 비 때문에 김이 서린 창문에 옛날 초가집과 이런 저런 것들을 그리며 외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친척 어른들과 부모님 말씀으로는 외할아버지가 나를 유난히 아끼셨다 했다.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도 마지막으로 엄마가 찾아뵈었을 때 나는 잘 있냐고, 눈은 괜찮냐고 여쭤보셨다 한다. 우리 가정의 가부장제는 친가와 외가의 가풍에서부터 내려온 것인데, 그렇게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던 외할아버지께서 처음 안은 아기가 나였다고 한다. 일가친척 분들은 그것이 무척 놀라운 사건이었는지 나만 보면 그 얘기를 한탄하듯 풀어놓으셨다. 


 가부장제를 누구보다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나지만, 그래도 아껴주셨다는데 어린 마음에 감사하지 않을리가 없다-애초에 나를 아껴주는 어른이 없었으니-. 그래서 나는 비가 내리면 기분이 다운되고, 센치해지기도 하지만 그리워지기도 한다. 외할아버지가 권위적인지, 유흥을 그렇게도 좋아하여 외할머니를 죽음에까지 내몬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초가집과 키우던 소의 얘기 같은 것들을 듣던 시절. 그때가 막연히 그리워지면 또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죽고 싶다.




 실제로 주요 우울장애 및 기분장애 환자들은 날씨와 계절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좀 기분이 안 좋다 싶으면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리거나, 비가 온다. 오죽하면 계절성 기분장애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진단적 범주는 아니지만 우울장애의 하위 범주이다. 계절성 기분장애를 겪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가을과 겨울에 우울감 및 무기력감을 겪는 사람들이 많으며, 대체로 봄이 되면 괜찮아진다. 그래서 사계절이 모두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을 탄다'와 같은 표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거나 치료를 받고 계신 분들은, 날씨를 자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원인을 모른 채 자꾸만 기분이 다운되고 처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짜증이 난다면 기상예보를 확인해보시라. 당신의 우울증의 근원이 그 무엇이든, 날씨는 확실히 지금 당장의 기분에 영향을 준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한층 편해지는 면이 있다.


 "나는 왜 이럴까? 비도 오고 기분도 안 좋고, 꿀꿀하기 그지 없어. 폭식으로 기분 전환을 하거나 하루종일 잠을 자버려야겠어."

같은 극단적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비가 와서 기분이 유난히 안 좋구나. 필요 시에 먹도록  처방받은 약을 더 먹고 기분이 좋아지는 활동을 하며 쉬어야겠어."

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사정이 풍족하다면, 병원에 가서 밝은 인공조명을 이용한 광선 요법을 받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요컨대 중요한 점은 비가 오면 다시 그치고 해가 나듯이, 당신의 기분도 반드시 회복될 거라는 것이다.




 비와 관련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빗 속의 사람 검사'라는 그림 검사를 들어 본 분들이 계실 것이다. 이것은 HTP(집-나무-사람 검사)와 같은 투사 검사로, 주로 우울과 스트레스를 겪는 내담자에게 많이 시행한다. 나도 이번에 빗 속의 사람 검사를 받아봤는데, 완성된 그림은 그야말로 누가 봐도 우울증 환자가 그린 것 같았다. 세찬 비바람 속 빗줄기가 흩날리고, 길과 도로 곳곳에 웅덩이가 고여있으며, 차와 빌딩으로 꽉꽉 막힌 배경은 답답하다. 나는 길 중간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고 애인은 옆에서 울며 내게 우산을 씌워준다. 상담선생님은 이것이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고 하셨다. 먼저 비는 현재 받고 있는 스트레스 양을 의미한다. 비가 고여 웅덩이가 만들어지거나, 천둥 번개가 치거나, 비바람이 몰아칠수록 스트레스 수준은 심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비를 막아줄 수 있는 우산이나 우비, 장화 같은 것은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스트레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심리적 자원이다. 그런데 내 그림에서는 우산을 애인이 들고 있었다. 그 얘기인 즉슨, 내가 가용할 수 있고 사용해야 할 자원을 애인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덕에 나뿐만 아니라 애인도 그림 속에서 몸이 반쯤은 젖고 있었다. 상담선생님은 이 우산을 내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하셨다.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죠? 제가 그걸 할 수 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었을까요?' 하는 반항심도 들지만, 알고 있다. 내 삶은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는 나의 인생인데 주도권을 남에게 넘겨준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 여전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하는 중이다. 그러나 우선 내가 자립적으로 인생을 살 수 있을 때 두 명의 건강한 관계도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애와 의존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이후에 다시 이 주제를 다룰 수 있다면 더 자세히 풀어보겠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다. 7월에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은 단 하루 뿐이라는 괴담 같은 소문도 돈다. 그런 요즘, 기분장애 환자들이 얼마나 힘들지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해가 뜰 것이라는 것. 우리는 그 사실 하나만 기억하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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