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심지어 작가도 끝나기 전엔 모르는 목차
지난 화 '자기소개'는 프롤로그, 그야말로 시작 중의 시작이라면 이번 글은 목차이다. 목차를 줄글로 풀어쓰는 사람이 어딨겠나 싶겠지만, 여기 있다. 이 에세이의 목차는 책 한 권을 완결 내기 전까지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나는 곪을 대로 곪은 내 지난 인생을 마주할 거고, 아직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심신으로서는 쓰고자 한 주제를 제때 바라보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 에세이를 통해 나는 내 과거를 간략하게나마 만나 볼 건데, 그러기엔 아직 자아가 단단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자아가 단단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내담자들에게 자아 강도, 자기(self)를 설명할 때 자주 쓰는 비유가 있다. 첫째는 흙이 잔뜩 가라앉아 있는 웅덩이에 돌을 던지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돌이 퐁당, 물에 닿는 순간 파란을 일으키고 가라앉아 있던 흙이 치솟는다. 언뜻 맑아 보이던 물은 순식간에 흙탕물이 된다. 아직 치료가 덜 된, 혹은 미처 강해지지 못한 자아에 스트레스를 주거나 상처를 직면시킨다는 것은 이렇게 흙탕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면 강하고 단단한 자아는 어떨까?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비유이다. 크고 묵직한 원형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친다고 생각해 보자. 흔들림은 무슨, 미동도 없다. 반면 테이블 위에 있던 볼펜 몇 개가 꽂힌 연필꽂이를 탁 친다면 어떨까? 와르르 쏟아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아를 크고 묵직한 원형 테이블만큼이나 단단하게, 작은 스트레스원이 찾아와도 끄떡없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생활의 사소하고 미묘한 어떤 점에도 금방 기분이 상할 것이다. 방금도 애인이 놀아주지 않았다고 삐져서 울어버린 나처럼 말이다.
어쨌든 분명한 점은 내가 이 에세이를 통해 지난 과거를 마주 보기로 했고, 그 목적은 나의 트라우마를 승화함과 동시에 치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울증이란 꼭 아픈 과거를 마주 보아야만 나을 수 있는 것인가? 기껏 모래를 좀 곱게 덮어놓아 봐줄 만해진 자리를 파헤쳐서 그 안의 해골과 뼈 등등을 다 드러내놓고
"자, 이것을 보아라. 너의 아픔의 원인이다."
해야만 나아질까? '나아진다'는 것은 뭘까?
상담, 즉 심리치료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귀결된다. 내담자의 심리적 부적응을 줄여 현실세계, 현재에 잘 적응해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려면 꼭 심리적 부적응의 원인을 파헤쳐야만 하는가? 아니다. 원인론의 대표 주자 프로이트가 있다면 목적론의 유명인 아들러-'미움받을 용기'로 잘 알려진-가 있듯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에도 몇십년이 걸리는 정신분석이 쓰일 수 있는가 하면 단기간에 끝나는 해결중심 가족치료 같은 것이 쓰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과거를 찬찬히 마주 보고자 하는 이유는 확고하다. 분명 글쓰기는 심리적 외상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더불어 과거를 잊고 현재의 나만 살피는 것은 대증요법밖에 될 수 없을지 모른다. 반대로 과거만 헤집는 것은 트라우마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나의 썩어빠진 고통과 가슴 속에 응어리 진 병의 근원을 글로 풀어내보고자 한다. 물론 현재의 나도 끊임없이 살피면서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내 글에 옛날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비교적 최근에 겪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모든 이야기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치유하고, 승화하면서 동시에 내 글을 읽을 여러분들께 도움이 될 심리학적 지식을 전하는 것, 그리고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계실 분들께 위로의 장을 마련해 드리는 것까지. 얼핏 보면 거창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오늘의 목차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당연하지만, 그러나 기적적이게도 현재 나는 살아있다. 살아서 이 글을 쓰고, 매주 열리는 에세이 챌린지에 참여하고 있다. 나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무슨 소리냐 할 테지만,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 가늠할 수도 있겠다. 내가 겪어온 삶의 험난한 굴곡을 말이다. 나는 종종, 인생을 압축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나라고 말한다. 사주팔자를 보러 가거나 신점을 보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너는 말년 운이 좋네. 뒤집어서 말하면 초년 운은 하나도 없네, 부모 복이 지지리도 없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부 싸움에 노출되었고, 가정폭력과 성추행, 성희롱을 당했으며 20살 성인이 되어서도 뺨을 맞고 살았다. 거기다 20대 초반, 의료사고로 인해 1년간 눈을 뜨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았으며 모아둔 돈 하나 없이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어릴 때부터 틱장애와 심한 우울감 및 자살사고가 있었으며 심각하진 않지만 자해를 해봤고 자살 시도를 해봤으며 정신병동에 입원했었고 지금도 간헐적으로 자살사고와 자해 충동에 시달린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매일 30개가 넘는 약을 2년 가까이 꼬박꼬박 먹고 있는데도 말이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살아있다. zip 된 내 인생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풀어나갈 테지만, 겨우 20대 중반인 내가 이렇게 다사다난한 인생 롤러코스터를 타고-실제 놀이 기구는 전혀 못 타는데도 말이다-고작 2n년 만에 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어도 나는 살아있다. 앞으로 이어질 에세이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을 잘 보내고 있고,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으며, 때로 상당히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 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하루살이로 스스로를 표현하다가도 어느새 3년, 10년 뒤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것.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당장 내일만 생각해도 아득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래도 어느 순간 이렇게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저 암담함과 죽고싶음 보다는 미소가 그려지기도 하더라. 내가 건네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프롤로그에서 말했듯, 나는 흙이 잔뜩 묻어 더러워진 손이라도 괜찮다면, 진심으로 그대들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이 손을 잡으면 당신도 조금은, 적어도 나만큼은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럼 이제, 제 손을 잡고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