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우린 안돼요.
오늘은 엄마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앞에 나온 두 편의 에세이마다 꼭 한 번씩 어록을 남기신 우리 엄마. 어릴 땐 그저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 없었으며 내 인생의 악마라고 여겼으나, 크고 나서야 그 폭력의 시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된, 엄마이기 전에 사람이었던 우리 엄마.
나는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20살 때까지 엄마에게 신체적 폭력을 당했고, 스물 중반까지 언어적 폭력을 당했으며, 지금은 거의 연락하지 않고 살고 있다. 아빠는 그래도 나는 딸이라고 아주 어릴 때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엄마는 달랐다. 훈육과 양육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엄마는 옷걸이, 회초리, 우리의 장난감, 손 등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해냈다. 종아리와 등에 피가 나고 옷걸이 자국이 아로새겨져 차마 바로 눕지도 못하고 엎드려 자던 날, 잠결에 내게 약을 발라주며 울던 엄마를 본 기억이 있다.
우리 엄마의 양육 방식은 일관되지 못했고 그날의 기분에 달려있었다. 평소라면 손찌검 당했을 일에 묵묵히 뒷처리를 해주며 괜찮냐고 묻던 엄마, 그게 너무 이상해서 혼이 안 났음에도 무서워 하던 내가 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땐 별 것 아닌 일에도 벌컥 화를 내며 나를 몰아붙이던, 집 밖으로 내쫓고 줄넘기를 100개 넘기 전까진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엄마가 있었다. 부모의 일관되지 못한 양육 방식은 불안정한 애착을 만들어낸다. 나도 불안정 애착이며 그 중 (양가)저항형 애착이다.
청소년일 때 내가 너무 이해되지 않고 싫어서 운 기억이 있다. 이렇게 엄마에게 맞고 살아온 나는 엄마를 미워해야 맞는데. 왜 아직도 바보처럼 엄마의 사랑을 갈구할까. 엄마한테 맞고 혼나고 나면 빨리 커서 집을 나가야지,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조금만 잘해주면 다시 헤벌레 하며 애교를 부리는 내가 싫었다. 여전히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던 중학생의 나는 어디에서도 안정적인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처럼 부모가 안전기지 노릇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이를 해치는 적이 되는 집안도 많다. 그런 내담자들이 오면 상담자들은 로저스가 제시한 상담가의 가장 기본 자세,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과 공감적 이해 그리고 경청을 해야하는 것이다.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이란 당신이 어떠한 언행을 하더라도, 심지어 범죄자라도 당신은 인간이기에 그 자체로 가치있으며 나는 그런 당신을 믿고 존중한다는 자세이다. 나는 이 자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 폭력의 가해 학생이 의무 상담을 오거나 비행청소년이 인성교육을 받으러 와도 잔소리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찾게 한다. 아무리 악한 행동을 했더라도 본성은 주양육자의 사랑과 관심, 안정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상담 자리에서 충분히 존중받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숨겨왔던 선함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다시 어린 시절의 우리집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엄마와 아빠는 3일에 한 번 꼴로 싸웠다. 엄마가 집을 나가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그릇이 깨지고 날카로운 말들이 칼부림을 치며 서로를 갈랐다. 아이였던 나는 그저 방에 틀어박혀 덜덜 떨며 울고 있거나, 오빠와 손을 부여잡고 이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틀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늘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말그대로 얇은 얼음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 같았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맞는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엄마는 우울증이 있었다. 그걸 자주 무기로 내세우며, 내가 진짜 죽는 꼴 보고싶냐고 협박하곤 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된 오빠가 자살 시도를 하고, 병원에서 어머님보다 아드님이 우울증이 더 심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협박이 사라졌다. 오빠와 나는 초등학생일 때, 병원에 갔다가 한 신문에 실린 우울증 테스트를 했는데 둘 다 심각한 수준의 우울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나온 적이 있었다. 어렸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넘겼는데, 엄마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무덤덤했던 것 같다.
나는 2살 정도까지는 외할머니 손에서 컸고 이후로는 오빠와 함께 할머니 손에서 컸는데, 할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심하셨다. 오빠는 애지중지 키웠지만 나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키우셨다. 우는 나를 달래지 않고 머리를 때리는 걸 목격한 엄마, 살려달라고 우는데도 때수건으로 모기 물린 곳을 박박 닦으며 피가 나게 아이의 살결을 해치던 할머니를 본 엄마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양육을 도맡기 시작했다. 그게 엄마의 우울증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후우울증도 분명 있었을 테고, 안그래도 일이 힘들고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아 맞벌이를 하는데 자기 아이는 시부모 손에 맞고 있으니 심정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우울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할머니가 가사노동과 양육을 도맡고,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아기였던 내가 맞고 있었다는 점에서-와 본인의 장녀 콤플렉스에서 기인했던 것 같다.
앞서 친가와 외가 양쪽 다 가부장제가 심하다고 말한 바 있다. 외가는 엄마가 장녀이고 밑으로 아들 둘, 딸 하나가 있는데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의 도시락을 손수 싸주어 학교에 보냈다고 했다. 빵가게를 하던 외할머니의 일을 돕고 가사노동을 대신하는 것은 물론, 동생들 양육까지 도맡았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엄마는 외할머니께 맞으며 자랐고, 외할아버지의 사랑과 유산은 아들들에게만 돌아갔다.
그런 집에서 태어나, 애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양육관 속에서 장녀 노릇을 하고, 대학에 가서 바로 연애 후 결혼을 했는데 남편과 시댁 또한 가부장제 그 자체였으니. 엄마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미처 생각할 겨를 없이 계속 누군가를 돌봐야 했던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평생 받지 못한 엄마에겐 우울증이 안 생기는 게 이상했다.
폭력은 아래로 흐른다고,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엄마의 자녀들에게 돌아갔으며 그래도 본인이 남녀차별을 너무 당해 자기 자식들만은 똑같이 키우고 싶었다던 엄마는 두 아이를 조울증, 주요 우울장애, 간헐적 폭발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키워냈다. 물론 아빠의 압도적인 가부장적 분위기는 우리집 가풍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자녀들의 정신장애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이후에 서술하겠다.
어쨌든 나는 우울증을 가지게 되었으며, 나의 우울은 내면으로 들어가 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만들었다. 나의 오빠는 우울이 외부로 향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주 물건을 부수거나 거울을 깨고 화를 냈다. 상담 선생님 말씀으로는 오빠의 경우 중학생 때 이미 자살시도를 했으니 일찍 발현이 된 것이고, 나는 우울을 꾹꾹 내면에 눌러왔다가 성인이 되고 나중에서야 터뜨린 것 같다고 했다.
그 덕에 나는 22살에 한의원을 갔다가 홧병 진단을 받았으며, 취준 시기를 지나면서 우울이 더욱 심해져 주기적으로 자살사고를 느끼게 되었다. 매달 오는 자살사고-이것을 우리는 우울 삽화, 우울에피소드라고도 한다-가 몇 년 간 지속되고 몇 번의 결전의 날(내가 죽을지 말지를 완전히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던 날)이 지나자 나는 자해 충동 또한 느끼기 시작했다. 자해는 한 번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걸 알기에 절대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지만, 벽에 머리라도 박고 나를 때리고 싶은 충동은 계속 되었다. 그래서 최근엔 약한 리스트컷을 해보았다. 피가 난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담선생님께 많이 혼났다.
나 스스로 우울증이 심해졌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문득 차도에 뛰어들고 싶어졌을 때-부터 상담을 받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엄마를 이해하고 친구처럼 지내보려 했다. 그러나 20회기의 긴 상담 후에 나는 깨달았다. 엄마와 나는 애초에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고, 지나가던 인연으로 만났다면 바로 손절했을 정도로 성격과 가치관이 안 맞다는 것을. 나는 직업적으로나 타고난 것으로나 정서에 민감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데, 엄마는 극 T이다. 사실 T라고 말하기엔 T들한테 미안할 정도로, 공감이란 걸 해보지 못했고 받아본 적도 없으며 그냥 그게 안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고 해탈했다. 친구같은 엄마와 딸 사이는 우리에겐 존재할 수 없구나.
인정하고 포기하면 편한 부분이 꽤 있다. 오랫동안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욕심을 놓아야 하는 상실감도 컸고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품어주는 사랑하는 엄마'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나 포기를 하고 나니 적당한 거리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엄마에게 집착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괜히 혼나고 감정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엄마에게 아플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전화하지 않는다. 그저 가끔씩 안부 전화는 드리지만, 최소한의 성의가 전부이다. 우리 사이는 이렇게 미적지근하거나 멀어지는 것이 가장 맞는 것 같다.
많은 딸들이 엄마에 대한 죄책감, 미움, 그러나 사랑과 인정욕구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한마디 건네고 싶다. 굳이 당신이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같은 여성으로서 이해되는 부분이 많겠지만 용서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껏 미워해도 된다고. 그러나 엄마도 사람이고 싶었을 거라고. 그냥, 그뿐이라고.
그러니 이제는 엄마를 놓고 당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엄마의 인생은 엄마가 알아서 잘 해내실 것이다. 뒤늦게 자아를 찾을 수도 있고, 우리 엄마처럼 책과 공부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많이 반성하면서 아이들에게 최대한 다시 잘해주려 노력할 수도 있다. 그래도 과거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 수 없는 법이다. 나는 남보다 못한 부모 자식 관계가 분명 있다고 믿는다. 나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엄마를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 놓아주고 각자의 인생을 살자. 부모 자식 간, 모녀 간, 그런 것보다 '나'를 위해 살자. 이게 바로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