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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두건 Jul 23. 2023

내 인생을 바꾼 마법 제과점

심리학자를 꿈꾸다

 중학교 1학년의 여름날, 나는 친구에게서 책 한 권을 빌렸다. 구병모 작가의 등단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그 잔혹하고도 따스한 판타지 속에서 나는 내 꿈을 찾았다. 나도 위저드 베이커리의 점장처럼, 나같이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청소년들에게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주고 싶다. 잠깐이라도 기댈 수 있는 나무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런 마음에 알아낸 직업이 '청소년 상담사'였다.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 영재 캠프에 가고, 과학 대회를 다니고, 과학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나에게 들이닥친 변화는 마음에 돌풍을 일으켰다. 심리학에 대해 조금씩 알아볼수록 빠져들었다. 이거라면 이 지긋지긋한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고, 상처 입은 나를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옥 같던 내 인생의 한 줄기 빛 같았던 그것. 나뿐만 아니라, 내가 심리학을 공부해 전문가가 된다면 나와 같은 지옥에 놓인 또 다른 아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내지는 사명감. 그것 하나로 대학 입시까지 달렸다.


 Schafer는 심리치료자가 되려는 무의식적 동기를 4가지로 나눴다. 첫째, 타인의 사생활을 훔쳐보고자 하는 관음증적 동기. 두 번째,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고 마술적으로 치료하고자 하는 마술사적 동기. 셋째, 내담자를 통제하려는 지배자의 동기. 넷째, 고통받는 자에게 메시아와 같은 역할을 하여 인생의 빛을 제시하고자 하는 구원자의 동기. 나는 구원자의 동기로서 심리치료자를 꿈꾼 것이다. 어머니의 곁에 앉아 내가 가고자 하는 진로를 설득하면서 이야기했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명의 청소년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인생의 목표를 다 이룬 거라 생각한다고. 


 그러나 이런 갑작스러운 진로 동기 변화는 부모님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오빠가 자살시도를 하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였고, 부모님은 정신질환에 관해 꽤나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 본인도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원에 다녀보았을 때 의사가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약만 주더라며-지난 글에서 말한 바 있지만 정신과에서 제대로 된 '상담'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심리치료로써의 '상담'과 그저 대화 나누는 방식을 흔히 일컫는 '상담'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기 때문에 정신과에서 치료적인 상담을 기대할 수가 있다.-불평을 늘어놓으시는 때였다. 아버지 또한 워낙에 자신의 약점과 사적인 이야기를 남에게 드러내는 걸 싫어해서 그렇지, 정신과에 한 번 가보면 각종 장애를 진단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부모님들께서 본인들의 정신건강이 안녕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에, 자녀가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필수불가결할 것이라 느끼면서도 강한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어쩌면 심리학자가 된 딸이 이렇게 자신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며 비난할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심리학과 진학을 매우 반대하셨다. 더불어 나는 서울 소재의 대학을 갈 성적이 충분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가면 물가가 너무 비싸고 집값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하셨다. 아빠는 네가 심리학과에 가겠다면 등록금을 내주지 않겠다는 선포까지 하셨고, 엄마는 매일같이 고3인 나를 거실에 앉혀놓고 가정의 재정상황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으며 나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그러나 반항심 가득하던 사춘기, 안 그래도 가정폭력 때문에 미움이 가득한 부모님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나는 더욱더 싸웠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다. 바로 성적을 올리는 것. 우리 때는 9월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 성적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9월 모고에서 기어코 최고점을 찍어냈다. 11211. 전국 백분위가 97%였던 걸로 기억한다. 9월 모의고사 외에도 모의고사 성적을 고 3 일 년 동안 꾸준히 유지해 가며 점점 성적을 올렸다. 나를 막고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는 장애물만 없었다면, 충분히 날갯짓을 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10월, 수능이 다가오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자주 겪었다. 부모님과의 갈등은 최고조였다. 


 수능을 치고 나오던 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제야 끝났다는 실감, 이렇게 끝나버린다는 허무함, 성적이 잘 나와도 내가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없으리란 불안감. 그 모든 게 수능 성적에 반영되어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받은 시험 성적 중 최악의 성적을 수능 성적표로 받았다. 모든 게 무너진 기분이었다. 부모님은 재수 생활을 지원해 줄 돈이 없다며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이미 못 박아둔 상태였기에, 재수는 꿈도 못 꿨다. 오히려 성적을 본 엄마가 뒤늦게나마 재수를 권했으나, 내 마음속에 이미 그 가능성은 삭제된 지 오래였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하향으로 넣어놨던 심리학과 논술 시험을 치러 갔고, 원하던 서울권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합격을 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들은 이후 내게 꾸준히 좌절감을 주었다. 지방에서는 칭찬하는 대학이라도 서울권 대학과 비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대도시라도 서울보다 인프라가 좋을 순 없었다. 나는 그저 지방에 처박혀서 평생 가난하게 입에 겨우 풀칠하며, 자린고비가 밥 한 술에 굴비 보듯 서울을 바라보며 못 이룬 꿈을 그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심리학과에 수시로 합격하여, 심리학과를 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나는 국립대에 합격했기에 효녀 소리를 들으며 저렴한 등록금에 성적 장학금까지 놓치지 않고 챙겼고, 1년에 3명만 뽑는 교직이수를 합격해 전문상담교사 2급 자격증까지 얻었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남은 미련이 있었다. 과 특성상 대학원을 무조건 가야 이 직종에서 일할 수 있는데-아니면 임용을 칠 수도 있다-대학원만은 꼭 서울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또, 부모님의 선전포고가 있었다. 대학까지만 학비를 대줄 수 있고 이후는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 되고 보니 모아둔 돈이 없었다. 서울의 대학원을 가려면 돈이 배로 들 텐데 나는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였다. 그때부터 사회에 나가는 게 무서워졌다. 나는 아직 배운 것도 적고 머리에 든 게 없는데, 이런 내가 뭘 할 수 있지?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대학교 2학년이 끝나고 했던 라섹 수술에서 의료사고를 겪어 눈에 장애까지 생긴 상태였다. 우리나라는 시력으로만 장애를 진단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장애인증을 얻을 순 없었지만,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취업에도 난관이 있었으니 다른 복지국가를 간다면 장애인 판정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절망과 두려움, 조급함과 불안에 빠졌다. 그때서야 내 안의 우울이 본색을 드러냈다. 참고 참으며 꿈을 위해 달리다가 잠시 멈추어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던 그 순간, 암세포처럼 내 속에 숨어있던 우울이 나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자살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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