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벗, L이 세상을 떠났다. 나와 비슷한 아이였고, 그래서 아꼈고 좋아했다. 그는 자살했다.
그렇게 나는 '자살 생존자'가 되었다. 가족 또는 친구나 지인의 자살로 인해 남겨진 사람.
너는 떠났고 나는 남겨졌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계속된다.
너의 죽음에 비통은 커녕 미동조차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후세에서는 부디 아프지 않고 사랑받으며 편안하길 기도한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에게.
의료사고 1년 후.
다행히 일상생활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는 수준으로 눈이 회복되었다. 어쨌든 세상은 나 없이도 재깍재깍 빠르게 흘러갔으므로 움직여야 했다. 살아내야 했다. 삶은 머뭇거리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늘 먼저 내달렸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전문상담교사 2급을 따낸 것으로 임용고시를 쳐서 합격하느냐,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박사를 따느냐. 아니, 그 두 가지가 선택지인 줄 알았다. 졸업이 발 끝까지 들이닥칠 때까진 말이다. 막상 까놓고 보니 나는 대학원에 진학할 공부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땡전 한 푼 없었다. 대학원이라도 서울에 가고 싶었는데 서울은 무슨 어디라도 감사합니다, 하고 가야 할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적극적으로 임용고시를 권하셨다. 지난번에 아빠는 야생곰에 자주 비유했다고 했었는데, 엄마는 말하자면 뱀 같아서 나의 불안과 걱정, 공포의 심리를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아주 잘 이용한다. 요즘 세대의 우리는 그걸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는 걸 대충 알고 있다. 엄마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때도 엄마는 내가 결국 임용고시를 선택하도록 교묘하게 구슬렸다. 내가 교생실습을 가던 2주, 일이 꽤 할 만하다고 전달하자 이때다 싶어 실습 중인 나를 붙잡고-물론 자유시간이긴 했다-1시간 넘도록 통화해 가며 끝내 임용을 하겠다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도록 만들었다. 사유는 지난 의료사고와 마찬가지였다. 내가 추후에 이 선택지에 반기를 들면, '네가 하겠다고 해놓고 왜 또 난리냐?'며 몰아붙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몇 년 후, 이 일은 내가 직감한 그대로 일어났다.
막상 임용을 하겠다 하고 몇 백만 원짜리 강의까지 끊어놨지만, 곧바로 불안감이 내 마음을 뚫고 가슴 가운데에 턱 하니 자리 잡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 녀석은 임용 공부를 멈출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수능 때도 그렇게 열심히 하고 망했는데. 나는 못할 거야.
확신에 차서 앞만 보고 달리던 고등학교 수험생 시절과는 다르게 나는 너무나도 눈에 띄게 방황했다. 임용고시를 위해 꼭 따둬야 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할 때는 너무 힘들고 하기 싫어서 울고 구역질을 하며 공부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과거와 다르다고 느꼈다. 특히 인지적인 부분.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할 것 없이 공부에 매진하던 고 3 때와 다르게 23살의 나는 채 30분도 집중하질 못했다. 이상했다.
밖에 나가면 온갖 사고들을 상상하며 죽고 싶어 했다. 차도에 뛰어들까, 다리 위에서 강으로 떨어질까, 미친 척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릴까. 다른 사람들은 재수 없이 상가의 간판이나 보일러가 떨어져 죽기도 한다던데 왜 나한텐 그런 일이 안 일어날까. 누가 날 좀 죽여줘. 아님 내가 죽여?
나는 내가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무력하게 누워있고 몇 날 며칠 씻지도 않고 낮밤은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면서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이었다.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어릴 때 엄마와 싸우고 엄마에 대한 망언을 휘갈기다 들켜서 한껏 혼난 뒤로 다신 안 쓰던 일기였다. 이거라도 안 하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 지금 다시 일기들을 살펴보니 버겁다, 죽으면 다 그만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1~2주 내내 하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눈물이 나오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4학년 마지막 학기, 심리평가 과목을 들으면서 자신의 MMPI-2 검사 결과를 해석하며 공부했다. 내 검사 결과는 가관이었다. 여러 척도가 높았고, 삐죽삐죽한 실선들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워서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기까지 했다. 취업준비생이 되어 사설 상담센터에서 MMPI를 다시 받았을 때는 놀랍게도 더 심했다. 상담선생님은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잠시 요양 차 본가에 가봤지만 앞서 부모님이 어땠는지 설명했으므로, 우울증이 더 심해졌음은 독자분들이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16층의 창가에서 30분가량을 아래를 보며 서 있었다. 그동안은 죽을 때 아픈 게 무섭고 싫어서, 시도할 생각을 안 했는데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록해 놓은 일기를 보니
'떨어지려는 노력마저 귀찮네 아'
라고 쓰여있다. 무기력이 심하지 않았으면 그때 아마 죽었을 것 같다. 기록에 의한 그때의 증상들을 설명하자면, 식욕 부진, 불면증(밤에는 잠을 못 자고 낮에는 내내 자도 졸린 증상), 자신을 영위하는 일상생활(세수, 양치, 샤워, 식사 챙겨 먹기 등)이 어려움, 자기혐오, 지속되는 우울, 자살사고, 죄책감, 무망감, 무가치감, 즐거움과 재미 감소, 신체적 통증(소화 불량, 부종 등. 한 달씩 체 해있기도 했다.), 주의집중 저하, 움직임의 둔화, 내가 꾀병 부리나? 우울증은 다 핑계인가? 하는 생각 등등...
이인증-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것 같은 현상-도 꾸준하게 나를 괴롭혔다.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초창기, 심각성에 비해 약을 늦게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인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느낌을 설명하자면, 마치 내 머리보다 10cm쯤 위에 정신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더불어 내 손과 발 등이 내 것이 아닌 느낌, 현실의 사물이 제자리에 있음을 인식하려 하고 오감을 사용해 느껴보려 해도 조금 느껴지다 말고 다시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리는 느낌. 이인증은 그 자체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지만(당시의 의사 선생님 피셜), 사람에게 기가 막힌 공포를 준다. 열심히 산책을 하다가도 밖에서 갑자기 이인증이 와 한참을 벤치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다시는 밖에서 그 증상을 겪고 싶지 않았다. 잘못하다간 이것 때문에 공황장애가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때쯤엔 내가 정말 심리학을 하고 싶은 건지, 심리학으로 먹고살고 싶은 건 맞는지, 엄마 말대로 배부르고 등 따수워서 살기 편하니까 우울과 자살 같은 생각이나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했었다-생각해 보면 엄마 본인도 우울증을 겪었고 자살하겠다고 어린 우리에게 자해공갈을 해놓고 딸이 죽고 싶다고 할 땐 네가 배불러서 그렇다고 하는 게 앞뒤가 안 맞긴 하다. 어쨌든 그때의 나는 앞뒤 여부를 따질 정신이 없었다-. 임용고시는 진짜 하기 싫었는데, 심리학은 100세 인생이라고 쳤을 때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안 해보고 죽으면 죽는 것보다 더 후회할 것 같았다. 결국 등 떠밀려 한 진로 결정이 날 궁지에 몰아넣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신과에 다니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나는 계속 주변에 자살에 대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므로 엄마도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엄마한테 맞아서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안타깝게도). 대신 부모님이 보내주던 모든 경제적 지원이 끊겼고, 나는 국민취업지원제도로 받는 돈으로 먹고살며 그때 마침 만나게 된 애인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리의 아찔한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