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애인은 거하게 차이고 있던 나를 달래주다가 얼떨결에 환승연애 당했다. 전 애인에게 상당한 모욕과 선 넘는 발언들을 들은 내가 미쳐버려서 벽장을 부수고 나와 그를 꼬셔버렸기 때문이다. 첫 만남 때 알게 됐는데, 그도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 당시 이미 몇 년을 먹고 있던 상태라서 나보다 선배였다. 그는 ADHD 의심 증상과 우울장애 증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내게 첫눈에 반했다 했다. 나는 전 애인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잊으려는 시도가 나쁜 것 같으면서도 최악의 상황인 내겐 어쩔 수 없어 보였다. 당연히 어느 정도의 죄책감이 있었다. 내가 이 착한 사람을 이용하고 상처만 주는 건 아닐까? 전 애인은 나를 좋아하려 노력해도 안된다 그랬는데, 나도 그러면 어떡하지? 그렇게 시작했는데, 웬걸. 어느새 내가 해변을 걸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를 너무 사랑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크고도 같을 수 있다는 것에 벅차서. 연애한 지 470일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그때의 벅찬 감동은 선명하다. 너무 고맙고, 내가 늦어서 미안하고, 그럼에도 나를 기다려줘서 감사하고, 아무 이유 없이 그라서 사랑했다. 연애 초반 그는 가끔 어리둥절해했다. 생각보다 내가 너무 빠르게 자신과 같은 마음이 되었다고 느껴서였다. 나도 당황스러웠지만, 내 마음은 순두부보다 말랑하고 연한 그의 품에 자꾸만 감겼다.
사랑하는 건 늘 즐거웠다. 행복하고 소중하고 경이로웠다. 우린 어쩜 이렇게나 운명일까, 감복할 정도였다. 그래도 어려움은 있었다. 내 주요 우울장애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어서, 취준생활과 백수를 넘나들면서 어쩌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한탄했다.
"난 지금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여보를 만나서 행복해. 여보가 집세도 내주고 있고, 국가 제도로 월 100만 원씩 받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있어. 안 행복할 여지가 없는데 왜 난 죽고 싶지?"
혼란은 나만 겪는 게 아니었다. 내가 주요 우울 삽화를 겪고 있을 때의 모습과, 아닐 때의 모습이 크게 달라 애인은 꽤 오래 두 이미지의 나 속에서 괴로워했다. 행복하다고 울다가도 죽고 싶다고 칼을 들고 인형을 찔러대는 모습이 얼마나 기괴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애인도 우울증을 심하게 겪어봤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나의 상태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때가 됐어. 아니, 이미 늦었어.
그때 나는 밖에 있었는데,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거의 조증이 온 듯 날뛰었던 게 생각난다. 사실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헐레벌떡 모든 것을 해냈다. 유서를 쓰고, 재산을 상속할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쓰고, 부모님께 잠시 일이 있어 방문하겠다는 거짓 전화를 하고, 택시를 탔다. 그 와중에 애인에겐 전화하지 않고, 가장 친하게 지내고 믿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오늘 죽을 거야. 너만 알고 있어야 돼."
그 친구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동생, L이었다. 뒤늦게서야 많이 후회했다. 그 애한테 그렇게 폭탄을 던지지 말 걸. 자기 일만 해도 벅찬 애를, 내가.
당황한 L은 곧바로 내 애인에게 연락을 했고, 애인은 빠르게 내 부모님께 연락을 취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본가를 갔는데 엄마가 내 곁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잠시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해도,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눈치챘구나, 싶어서 냅다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다-참고로 본가까지 가서 자살시도를 한 이유는 그곳이 16층이기 때문이다-. 육탄전이 벌어졌다. 밀고, 넘어뜨리고, 잡고, 아빠까지 와서 헤드락을 걸고 난리도 아니었다. 한참의 씨름 끝에, 체력이 약했던 나는 두 성인 남녀에게 지고 말았다. 아빠는 나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별 상관도 타격도 없긴 했지만. 엄마는 나를 데리고 애인에게 데려다주려 했다. 그때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던 애인이 전화를 잠시 받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방금까지 죽으려고 발버둥을 쳐놓고, 사랑하는 그가 나를 원망하며 먼저 죽어버렸을까 봐. 죽은 척 할 수 있는 약을 먹고 깨어나보니 사랑하는 로미오가 진짜로 죽은 것을 발견한 줄리엣의 기분이었다. 엄마는 황급히 나를 달랬다.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라 못 받는 거라고.
애인의 직장을 향해 가는 내내 빌었다. 설마 정말 나를 따라 죽으려고 하진 않았겠지? 여보는 살아야 해. 나는 죽어도, 소중한 여보는 살아 마땅해. 다행히 애인은 살아있었다. 나중에 듣기론 나와 헤어질까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지만, 어쨌든 나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우리는 계약서를 썼다. 다시 내가 자살 시도를 하면 헤어지기로. 나는 상관없었다. 혹시 그가 자살 시도를 한다면 기꺼이 곁에서 그토록 아팠을 그를 안아주고 다독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약서를 쓴 그가 밉지도 않았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선 해야 마땅한 장치였으니까. 또 나를 살리려고, 내가 또 그러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얌전히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우리가 늘 약을 타먹던 그곳은 폐쇄병동이 아닌 개방병동이어서 핸드폰도, 전자기기도 다 쓸 수 있었고 나 같은 자의입원의 경우 외출도 가능했다. 다만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무조건 간호사나 보호사가 카드를 찍어줘야 하고, 코로나 때문에 그와의 면회가 쉽지 않았고, 나는 이제 매달 국가의 돈 100만 원을 타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을 구해야 한다는 점이 번거로웠다. 죽고 싶어서 병동 7층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입원해 놓고, 하루 4번 무지막지하게 많은 알약들을 먹어가면서 한다는 게 이력서 쓰고 면접 보러 다니는 거였다. 그래서 병실 내 침대 옆 창가에는 늘 면접용 검은 정장이 걸려있었다. 오죽하면 의사 선생님이 면접 그만 보러 나가고 좀 쉬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확 늘린 약 복용량 덕분에 나는 꽤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2주 정도만에 자살사고가 절반 이상 줄었고, 병동 안에서 친해진 알코올 중독 자살 시도자나 조현병 환자들과 노는 게 재밌었다. 나는 안전하고 즐겁게 잘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나이 든 알코올 중독자가 평소 우리를 눈여겨보다가, 외출한 틈을 타 술을 마시고 와서는-자유로운 개방병동의 폐해라고 생각한다. 분명 외출해서 몰래 음주하면 내쫓긴다고 수칙에 쓰여있었는데!- 내게 시비를 걸었다. 계집애들이 자꾸 시끄럽게 떠든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무리 중 2명만 여자였고 나머지는 다 남자였는데도, 다리를 저는 약한 몸의 그는 저열하게 자신보다 사회적 위치가 낮은 여성을 지목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화가 났다. 평소엔 하지도 않는 욕을 하고 악다구니를 썼다. 소위 '코끼리 주사'라고 불리는 진정제 주사를 두 방이나 맞아야 했다. 1인실-그들은 보호실이라고 불렀다-에 끌려갈 뻔하기도 했다. 1인실 옆 방은 소변을 마시는 남자가 살아서 늘 지린내가 진동하고, 텔레비전도 없고, 화장실에 가려면 잠긴 문을 똑똑 두드려서 보호사가 열쇠로 잠금을 열어주길 기다려야 하는 최악의 방이었다.
그 길로 애인과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해 날 병원에서 꺼내달라고 했다. 애인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려고 했지만, 역시나 사회는 20대 여성에겐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엄마가 연락해서야 비로소 당일 퇴원할 수 있었다.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나와 도보로 10분도 안 걸리는 집에 가서 뭘 했더라. 펑펑 울었던 것 같다. 애인은 날 꼭 안아줬겠지. 그리고 얼마 뒤, 애인은 계약서를 찢어버렸다. 내가 다시 한번 자살시도하면 헤어지겠다던 그 계약서를. 찢은 종이가 이토록 감동적인 서프라이즈 선물이자 또 하나의 약속, 믿음이 될 수 있을까. 정말 특별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