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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애런 버카드

by 김성대

1987


커트와 크리스는 1987년 1, 2월에 걸쳐 리허설을 했다. 1992년 3월, 『시애틀 타임스』의 패트릭 맥도널드Patrick Macdonald가 "키가 크고 활기찬 빨간 머리 부인"으로 묘사한 크리스의 모친 마리야 노보셀릭은 크리스토와 이혼 뒤 미용실 위층으로 이사했다. 당시 커트에겐 작은 펜더 챔프Fender Champ 앰프가 있었고, 크리스는 피엠에스PMS 앰프와 그렉 호칸슨에게 빌려온 투박한 호너Hohner 베이스를 갖고 있었다. 2년여 뒤인 89년 11월, 독일 잡지 『스펙스Spex』의 세바스찬 자벨Sebastian Zabel은 자신이 쓴 기사에서 이때 미용실 합주 풍경을 전했다. 역시 록을 소음으로 생각한 마리야는 아들이 하는 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눈치다. “미국 북서쪽 태평양 연안 도시 애버딘의 한 미용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와 적막한 거리를 채운다. 겨우 30분 전에 가게 문을 닫은 노보셀릭 부인은 아이들에게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경고했다.”


크리스는 수줍음이 많은 친구에게 애써 말을 걸지 않던 엄마를 '커트는 재능이 있고 뭔가를 이룰 거예요'라며 안심시켰다. “난 그저 내 재산을 보호하려 합주하는 아이들을 내보내라고 크리스에게 소리 쳤을 뿐이에요. 방관하지 않았죠.” 커트는 친구 어머니가 자신을 ‘쓰레기’라 불렀다고 기억했다. “어머님은 날 미워했어요. 크리스에게 다른 친구를 찾으라며 날 무시했고 루저 취급을 하셨죠.” 어쩔 수 없이 이들은 합주실을 옮겨야 했다. 커트는 마리야가 허락한 3일 동안 《Bleach》에 실을 열한 곡 중 일곱 곡을 작곡했다.


커트는 1987년, 간당간당 대여 중이었던 마리야의 '미용실 합주실'에서 데뷔작에 실릴 일곱 곡을 썼다.


내가 처음이었다. 내 뒤를 이어 드러머가 네 명이나 더 있었지. 그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애런 버카드Aaron Burckhard


애런 버카드는 커트 옆집에 살던 드러머다. 콧수염을 기른 채 존 본햄John Bonham 풍 플레이를 즐겼던 애런은 이혼한 어머니와 생활보호대상자로 지내고 있었다. “데일 크로버네 맞은편에 살았어요. 매일같이 멜빈스 연습실에 가곤 했죠. 하루는 크리스가 커트를 데리고 왔는데, 처음 만난 바로 다음 날 자기네 밴드에서 드럼 칠 생각이 있느냐 물어오더군요.” 마약을 가까이 했던 버카드는 동네 버거킹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드럼 세트를 살 돈이 없었다. 사정을 들은 커트와 크리스는 버카드의 기존 드럼에 데일 크로버의 낡은 시어스Sears 키트 및 악보 받침대로 지탱한 심벌을 더해 그를 밴드로 데려왔다. 여기까진 순조로웠다. 문제는 음악 취향이었다.


하우스 파티에서 공연 중인 애런 버카드 시절 트리오 라인업. 사실상 너바나의 전신이었다. 사진=huffpost.com


스피드 메탈 밴드 아티카Attica를 거친 버카드는 초기 갱 오브 포, 스크래치 애시드, 버트홀 서퍼스 풍 불협화음 성향을 지닌 커트의 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주류 메탈을 더 즐겼다. “나는 메인 스트림을 많이 들었고 커트는 언더그라운드 신에 빠져 있었어요.” 술 문제도 있었다. 에버렛 트루에 따르면 버카드는 연습보단 술에 취하는 데 더 관심이 많은 ‘메탈 청년’이어서 커트를 짜증나게 했다. “맥주 마시고 대마초 피우며 연습하는 것 외엔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매일 밤 세트 하나를 서너 차례 연습하곤 했죠.” 사실 버카드는 너바나 전신에 몸담기 전 크리스가 드러머를 찾던 멜빈스에 먼저 소개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버즈 오스본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애런을 만난 지 2분 만에 ‘저 사람은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버카드는 실력이 아닌 인성 때문에 너바나의 드러머가 될 수 없었다.


이 시절 커트는 영국식 억양으로 노래를 불렀다. 미국 펑크는 장르 경향이었던 반면, 영국 펑크는 세대의 외침 또는 태도에 가까웠는데 커트가 표방한 펑크가 그런 영국 펑크였기 때문이다. 훗날 커트가 세대의 울분을 대변하고 대표하게 된 건 그래서 자연스러웠다. 버카드는 커트의 찢어진 청바지와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보헤미안식 태도에서 평범한 애버딘 약쟁이들과 커트의 차이를 보았다고 회상했다.


커트와 버즈 오스본. 버즈는 커트에게 멘토 같은 존재였다.

찰스 R. 크로스는 이 시기 커트가 멜빈스의 로드 매니저로 올림피아 공연에 10여 차례 따라갔다고 썼다. 커트는 짬이 날 때마다 기타 연습을 했고, 페컬 매터에서 벗어난 새로운 곡들을 쓰기 시작했다. 알려진 바로는 3개월 만에 열두 곡 정도를 완성했다고 한다. 버즈와 데일은 각각 베이스, 드럼을 맡아 그런 커트에게 무대 경험을 하게 해준다. 장소는 올림피아에 있던 헛간 같은 공연장 게스코 홀GESCCO Hall이었다. 록 공연과 미술 작품 전시회를 위해 ‘학생 단체’ 명분으로 태어난 이곳은 그러나 록 공연 도움 사실을 불편해한 학교 측에서 지원을 끊으며 위험을 겪은 바 있다. 커트는 여기서 관객 20여 명을 두고 버즈, 데일이 연주하는 동안 시를 읊었다. 이 즉흥 트리오의 이름이 바로 브라운 타월이었다. 와인에 취한 커트가 극도로 긴장한 탓에 공연은 거의 망친 것에 가까웠으나 관객 중 두 사람, 슬림 문과 그의 친구 딜런 칼슨Dylan Carlson만은 이 퍼포먼스에 깜짝 놀랐다.

특히 슬림 문에게 이 무대는 커트를 멜빈스 측근 중 ‘재능 있는 청년’으로 다시 본 계기가 됐다. “올림피아의 미학을 궁극적으로 증류한 밴드”로 평가된 드론 메탈/포스트 록 듀오 어스Earth의 멤버였던 딜런 역시 공연이 끝난 뒤 커트에게 다가가 자신이 본 공연 중 최고였다고 말했다. 커트와 딜런은 이후 올림피아 공연들에서 자주 마주치기 시작했고 곧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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