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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 칼슨, 그리고 애런 버카드의 탈퇴

by 김성대
커트는 우울한 사람이었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신나게 놀 때를 제외하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죠. 그 친구는 음악도 엄청 많이 들었는데 빅 블랙과 킬도저Killdozer, 스크래치 애시드와 소닉 유스 등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저와 딜런(칼슨)은 정신 나간 재즈와 킹 크림슨, 유라이어 힙, 메탈리카를 많이 들었고요. 레드 제플린, AC/DC 같은 클래식 록도 즐겼죠. 그 외 비트 해프닝, 바셀린스, 탈룰라 고시Talulah Gosh도 좋아했어요.

슬림 문


커트의 시 낭송 공연을 인상적으로 본 슬림 문과 딜런 칼슨은 커트의 옆집에 살았다. 딜런은 멜빈스의 첫 번째 앨범을 듣고 절망에 빠져 다시는 기타를 치지 않겠다며 자신의 밴드 어스Earth를 해체한 뒤였다. 총명한 데다 음악 재능도 있었던 딜런은 종교, 인종, 정치에 대한 솔직한 견해로 커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저 주제들은 두 사람이 젊은 성인기를 보내며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에버렛 트루에 따르면 딜런은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에 지저분한 수염을 길렀다. 확고한 인생관을 지닌 독학 천재형 인물로, 한번은 치아에 관해 알고 싶다며 도서관에 다섯 시간을 박혀 치아만 공부한 적도 있다. 1985년에 딜런을 처음 만났다는 서브 팝의 리치 젠슨은 이렇게 말했다. “13~14살 때 딜런은 어두운 아이였어요. 윌리엄 S. 버로스가 어둠의 아이콘이라면, 딜런은 버로스의 아이 버전 같았죠. 총과 헤비메탈, 이상한 종교가 그의 관심사였어요.” 딜런은 커트의 새로운 룸메이트가 된다.


1992년 워싱턴 주 벨링햄에서 딜런 칼슨(왼쪽)과 커트 코베인이 태드의 커트 다니엘슨(Kurt Danielson, 가운데)과 함께 있다. 사진=찰스 피터슨.


커트와 딜런은 먹고살기 위해 남의 집 카펫 깔아주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함께 했다. 비록 화려한 직업은 아니었어도 일은 둘에게 재정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함께 살고 함께 일하며 둘의 우정은 더 돈독해졌지만, 침대 밑에 늘 총을 보관하고 마약 중독에 시달리던 딜런이 내성적인 커트 곁에 있는 건 썩 바람직해 보이진 않았다. 때론 사람을 죽이고 싶다거나 록 스타가 되지 못하면 연쇄살인범이 되리라는 이상한 말을 뇌까리곤 했던 딜런은 나중 커트가 저승길을 택하기 전 이 이야기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


시애틀이 뉴욕이라면 터코마는 뉴저지다. 뉴저지에겐 뉴욕이 필요 없다.

스티브 피스크Steve Fisk, 음향 엔지니어/프로듀서/음악가


커뮤니티 월드 시어터에서 너바나를 처음 봤다. 슬림 문, 딜런 칼슨과 함께 갔는데 관객은 여덟 명뿐이었다. 그동안 멜빈스도 봤고 유-멘과 그린 리버도 봤지만, 너바나의 첫 음에서 비로소 ‘이거다!’라고 느낀 게 기억난다.

이언 딕슨Ian Dickson, 커트의 친구


터코마에 있던 포르노 극장을 개조한 커뮤니티 월드 시어터Community World Theater(CWT)의 주인 짐 메이Jim May는 무명 밴드들에게 공연 장소를 제공하곤 했다. 이언 딕슨이 본 커트 밴드의 공연은 짐의 친구였던 트레이시가 성사시킨 건이었다. 딕스Dicks, 잭 시트Jack Shit 같은 팀들이 같은 곳에서 공연했고, 멜빈스와 서클 저크스도 무대에 선 적이 있다.



짐은 커트의 밴드가 이름을 갖길 원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스키드 로우였다. 스키드 로우는 올림피아 게스코 홀에서 나름 큰 무대를 소화하기도 했다. 이후 너바나에 이르기까지 커트는 앞서 언급한 스로트 오이스터, 블리스, 펜 캡 츄, 윈도페인Windowpane 등을 밴드 이름으로 쓰거나 구상했다. 라이엇 걸 무브먼트Riot Grrrl Movement의 선두에 선 올림피아 펑크 록 밴드 브랫모바일Bratmobile의 리드 싱어였던 앨리슨 울프Allison Wolfe에 따르면 CCR의 <Bad Moon Rising>을 커버했던 스키드 로우는 70년대 펑크 록과 레드 제플린의 조합에 가까웠다. 슬림 문의 감상이다. “스키드 로우는 정말 멋졌어요. 그들 노래가 괜찮다고 생각했죠. 정말 헤비한 연주를 들려줬어요.”


커뮤니티 월드 시어터는 무명 밴드들이 젖니를 빼는 장소였다.

버즈 오스본


그런데 커트는 "젖니를 빼는" 동안 CWT에서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한 달 열 두 차례 공연 중 두 건 정도만 돈이 되는 공연장 사정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짜 공연은 더 많은 경험을 담보해 주었기 때문에 커트는 무보수 무대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데일 크로버는 커트에게 충고했다. 단돈 20달러를 받더라도 그건 원칙의 문제라는 것이다. 크로버의 조언에 따랐는지, 이후 짐은 커트에게 주류비 명목으로 10달러 정도를 챙겨주며 최소한의 도덕적 처신을 했다.


커트의 밴드는 바뀌는 이름만큼이나 불안한 양상을 보였다. 그나마 보잉 구내식당에 일자리를 구한 셸리와 크리스가 터코마로 이사를 가며 팀이 일시 와해된 건 커트의 종용커트는 크리스에게 편지를 써 밴드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으로 금세 다시 뭉치며 없던 일이 됐다. 불안의 핵심은 드러머 버카드였다. 공사장에서 가져온 나무판자와 낡은 카펫으로 크리스네 지하에 연습실을 장만하는 동안, 자신은 그레이스 하버에서 드럼 키트를 물색하겠다던 버카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연습에도 나오지 않았다. "커트와 크리스는 매일 밤 연습하고 싶어 했어요. 내가 몇 차례 나타나지 않자 둘은 화를 내더군요. 사실 난 밴드를 재미로 시작했을 뿐이에요. 그걸로 돈 벌 생각은 애초에 없었죠." 결정적으로 버카드는 커트와 크리스만큼 펑크 록에 빠져 있지 않았다. "난 그런 스타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머리 색깔이 다르고 뭐 그런 것들." 당시 크리스와 셸리는 터코마에, 커트는 올림피아에 있었지만 버카드는 계속 애버딘에 머물며 버거킹 정식 매니저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버카드와 함께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 커트와 크리스는 결국 87년 10월 『더 로켓』에 구인 광고를 낸다.


진지한 드러머 구함. 블랙 플래그, 멜빈스, 제플린, 스크래치 애시드, 이설 머먼Ethel Merman 같은 언더그라운드 성향.


하지만 응해온 드러머는 없었고, 둘은 12월 데모 녹음을 위해 데일 크로버와 연습을 시작했다. 마침 87년 11월, 스킨 야드와 한 달간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멜빈스가 잠시 찢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 그린 리버도 피스트(Feast)도 흩어졌다. 너바나 데뷔작을 만질 잭 엔디노의 기억에 따르면 저들이 물러난 자리엔 스킨 야드, 사운드가든, 번들 오브 히스Bundle of Hiss가 있었다. 번들 오브 히스는 포스트 펑크 정신과 클래식 블랙 사바스 리프를 결합시킨 그런지 밴드의 또 다른 전형이었다. “나는 앵그리 사모안스Angry Samoans 같은 비열하고 난삽한 것 대신, 아름답고 멋지고 예쁜 밴드 이름을 원했다.” 커트는 자신이 원하는 밴드명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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