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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잭 엔디노

by 김성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 시애틀과 올림피아 신은 경쟁이 심했다. 시애틀 밴드들은 올림피아 밴드들이 연주에 서툴고 순진하다 생각했고, 올림피아 쪽은 시애틀 밴드들을 신념도 창의성도 없는 술주정뱅이 헤로인 중독자들로 봤다. 너바나는 잭 엔디노와 서브 팝이라는 스폰서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시애틀로 진출할 수 있었다.

슬림 문


커트와 크리스는 88년 1월, 애버딘에 있는 데일 크로버 집에서 리허설을 했다. <Love Buzz>, <Downer>, <Mexican Seafood>, <Pen Cap Chew>, <Spank Thru>, <Floyd the Barber>, <White Lace and Strange>, <Hairspray Queen>, <Anorexorcist>, <If You Must>, <Mrs. Butterworth>, <Gypsies, Tramps, and Thieves> 외 무제 두 곡까지. 합주는 여태껏 무대에서 선보였던 곡들을 망라했다. 버카드가 빠진 드럼 자리엔 집주인인 크로버가 앉았다.


3주 주말을 꼬박 연습에 바친 셋은 시애틀 무료 음악지 『더 로켓』에서 발견한, 가장 저렴했기 때문에커트가 시간당 녹음 비용이 20달러라는 광고를 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가장 핫했던 25평 규모 레시프로컬 레코딩 스튜디오Reciprocal Recording Studios에서 1월 23일 녹음 날짜를 잡는다. 알려진 바로는 커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시애틀 신생 인디 레이블 서브 팝이 거쳐 갔을뿐더러 커트가 좋아한 사운드가든의 EP 《Screaming Life》가 태어난 스튜디오였기 때문이라는데, 생전에 커트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너바나 데뷔작을 프로듀싱 할 잭 엔디노. 레시프로컬 레코딩 스튜디오 앞에서 한 컷. 사진=빌보드.


(사진가) 찰스 피터슨과 잭 엔디노는 밴드의 에너지를 잘 포착했어요. 둘은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해 주었죠. 잭은 사실상 서브 팝의 사내 프로듀서였습니다.

브루스 파빗, 서브 팝 공동 창립자


스킨 야드는 사운드가든만큼 중요한 밴드였다.

커트 다니엘슨, 태드Tad 베이시스트


코네티컷Connecticut에서 태어난 잭 엔디노는 솔즈베리Salisbury에서 살다 열일곱 살 때 워싱턴 주 베인브리지Bainbridge Island로 이사했다. 같은 주의 브레머튼Bremerton 해군 조선소에서 민간 전기 기술자로 일하던 그는 자기 일이 “영혼을 파괴하는 직업”이라고 판단, 1983년에 퇴사했다. 회사를 나와 워싱턴 주 벨페어Belfair 외곽에 있는 타이거 레이크Tiger Lake 인근에 한 칸짜리 이동식 주택을 빌린 엔디노는 드럼과 4트랙 녹음기, 앰프와 스피커, 기타 몇 대를 가지고 83년 겨울 동안 자신을 “실험용 쥐”로 삼아 녹음하는 법을 독학하며 보냈다.


잭 엔디노는 프로듀서 이전에 음악가였다. 그는 최초 그런지 밴드 중 하나인 스킨 야드의 멤버였고기타를 쳤다 크립트 키커 파이브Crypt Kicker Five에선 드럼을, 원스The Ones에선 베이스를 쳤다. 모두 88년도에 몸담았던 팀들이다.

스킨 야드는 그런지에 프로그레시브 록을, 구체적으론 킹 크림슨King Crimson을 가미한 밴드였다. 거기서 드러머였던 맷 캐머런Matt Carmeron은 빌 브루포드Bill Bruford의 충동을, 엔디노는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의 지성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스킨 야드는 크리스 노보셀릭이 좋아한 밴드이기도 했다. “그들의 《Hallowed Ground》는 정말 훌륭하다. 첫 번째 앨범은 킹 크림슨처럼 너무 헤비하기만 했는데, 《Hallowed Ground》는 좀 더 록킹한 느낌이었다.” 사운드가든 드러머로 유명해질 캐머런은 스킨 야드에서 1년 반 정도 활동하고 86년 봄과 여름 사이 팀을 떠났다.


크리스 노보셀릭은 잭 엔디노가 몸담았던 '그런지를 하는 킹 크림슨' 스킨 야드의 《Hallowed Ground》를 좋아했다.


레시프로컬 스튜디오를 얘기하려면 엔디노 외 이름 하나를 더 짚고 가야 한다. 크리스 핸즈크다. 우린 앞서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유-멘, 맬펑션, 사운드가든, 그린리버, 멜빈스 등이 참여한 컴필레이션 앨범 《Deep Six》를 기획했고 멜빈스의 1986년 EP 《Six Songs》를 비롯해 기츠Gits, 세븐 이어 비치7 Year Bitch 등 마니악한 팀들의 작품도 품었던 시지 레코드. 핸즈크는 그 레이블의 대표였다. 핸즈크가 스튜디오를 시작한 건 1984년 초로, 그는 새 사업을 위해 돈과 장비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스킨 야드 베이시스트 대니얼 하우스Daniel House에게 시지 레코드를 넘긴 헨즈크는 그렇게 스튜디오 소유주 겸 매니저, 수석 엔지니어로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엔디노는 이 시기 헨즈크와 한 달 정도 파트너로 일하며 프로듀서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시애틀 발라드Ballard 소재, 1930년대에 지어진 갈색 석조 건물이었던 레시프로컬은 86년 7월 1일에 문을 열어 1991년부턴 워드 오브 마우스Word of Mouth로, 1993년부턴 존 앤 스튜스John & Stu’s로, 2000년도 이후론 홀 오브 저스티스Hall of Justice라는 이름으로 운영됐다.



“엔디노는 펑크 록 언더그라운드를 거의 알지 못했지만 내가 가진 음반들을 빌려 들으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빅 보이스Big Boys, 버트홀 서퍼스, 미닛멘 등을 그렇게 알게 된 거죠.” 사운드가든의 킴 테일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는 아주 적은 돈으로 수많은 펑크 록 밴드들을 녹음하며 신의 성장을 이끌었고, 서브 팝의 재정 안정에도 큰 도움을 줬습니다.” 시애틀 펑크 록 밴드 데레릭츠The Derelicts 프런트맨 듀언Duane Lance Bodenheimer의 증언은 프로듀서 잭의 또 다른 면도 엿보게 한다. “엔디노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함께 작업하기 편했고, 우리 헛소리도 잘 참아줬죠. 무엇보다 자기 일에 관한 지식이 매우 풍부했어요. 일처리는 간단하고 정확하게, 모든 것을 적시에 처리했습니다.” 이는 엔디노를 ‘겸손하고 꼼꼼한 프로듀서’로 기억하는 마크 암(머드허니)의 말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엔디노의 저런 느긋하고 소탈한 면과 그가 뽑아낸 강렬한 사운드는 날것 그대로를 추구했던 지역 젊은 밴드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당사자에 따르면 그 인기의 정도란, 약 1년간 지역 내 거의 모든 밴드가 자신에게 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자기들과 같은 음악가여서 나를 믿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엔디노는 부지불식간에 시애틀 음악계의 대부가 돼 있었다.


너바나 전기 작가인 아제라드와 에버렛의 묘사를 종합해 보면 레시프로컬 스튜디오는 파티클 보드 벽particle-board walls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고 구석구석 담배 자국이 남아 있으며, 카펫에 맥주를 흘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또 에어컨이 없어 날씨가 더워지면 문을 열어두고 지나가는 트럭 배기가스를 온전히 마셔야 했다. 쐐기 모양 삼각형 형태였던 레시프로컬 사무실은 컨트롤 룸과 화장실, 출입문 정도로 소박했다. 화장실 주변엔 작은 격리실이 있었는데, 앰프 한 대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커트 일행은 크리스의 친구 드와이트 코비의 장작 난로가 달린 낡은 쉐보레 캠핑카를 타고 이곳으로 향했다.


1988년 1월에 제작한 너바나의 첫 데모 테이프. 곡 제목들은 엔디노가 직접 썼다.


커트는 녹음 일정표에 자신의 이름을 ‘Kurt Covain’이라고 잘못 쓴 잭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애버딘 출신 커트라고 해요. 멜빈스의 친구이기도 하죠. 우린 지금 스튜디오에서 아주 빨리 몇 곡을 녹음하고 싶은데, 드럼은 멜빈스의 데일 크로버가 칠 거예요.” 당시 데일은 존 본햄 계통의 실력파 드러머로 소문이 자자했던 때. 잭은 ‘데일이 함께 연주할 정도면 최악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래, 좋아. 시작하지.” 엔디노는 문을 열어주었다.


밴드를 면전에 대한 엔디노는 세 가지 점에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첫 번째는 베이시스트 크리스의 ‘기형적인’ 장신, 두 번째는 마크 암이나 크리스 코넬처럼 젠체하지 않는 커트의 ‘샤이shy한’ 모습, 그리고 <If You Must> 녹음을 시작한 71초 뒤 커트의 보컬에 경악한 일이 세 번째다. “이 녀석, 샤우팅이 끝내주는구만!!” 엔디노에게 그건 당시까지 들었던 목소리 중 최고였다. 일본 음악평론가 오타카 슌이치는 엔디노의 탄성에 이런 해석을 보탠다.

너바나의 음악이 늙지 않고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커트가 만들어낸 노래 속 원초적인 외침, 휘몰아치는 그루브가 지금도 사람과 시대의 무언가를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잭이 직접 곡 제목들을 써넣은 너바나의 첫 데모 테이프에 커트는 ‘커트 코베인과 동료들Kurt Kovain [sic] and Co.’이라고 남겼다. 본명sic을 강조하며 본명Cobain이 아니라는 걸 부각한, 그가 즐긴 뒤틀린 유머의 전형이다.


<If You Must>를 시작하고 1분 여 뒤 엔디노는 커트의 샤우팅에 경악했다.


커트의 밴드는 <If You Must>, <Pen Cap Chew>를 비롯해 《Bleach》에 실리는 <Downer>, <Floyd the Barber>, <Paper Cuts> 버전과 《Incesticide》에 실리는 <Hairspray Queen>, <Aero Zeppelin>, 그리고 컴필레이션 앨범 《Kill Rock Stars》에 실릴 <Beeswax>, 미니 컴필 앨범 《Teriyaki Asthma Vol. 1》에 건넬 <Mexican Seafood>를 녹음하고 믹싱까지 한 번에 갔다. 커트는 모든 보컬 녹음을 원테이크로 끝냈고, 트랙들 역시 라이브로 한 두 차례 테이크를 거쳐 녹음했다. 추가 요금 30달러40달러라는 얘기도 있다를 내지 않아 두 번째 코러스가 시작될 무렵 멀티트랙 마스터 테이프가 다 떨어져 페이드아웃으로 처리된 <Spank Thru>는 나중 채드 채닝이 드럼을 연주한 버전으로 다시 녹음돼 서브 팝 컴필레이션《Sub Pop 200》에 실린다. 준비했던 다른 두 곡 <Anorexorcist>와 <Erectum>은 결국 녹음하지 못했다.


그래도 커트는 만족한 눈치다. “데모 테이프 녹음 뒤 우린 그것이 실제 좋은 음악이고 거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진지하게 받아들였죠.” 엔디노의 기억에 따르면 그날 커트와 친구들은 정오에 와서 3시쯤 녹음을 끝내고 5시 정도에 믹싱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남은 건 스튜디오 사용료 정산. 당시 크리스는 직장에서 해고된 상태여서 녹음 비용은 커트가 웨더왁스 고등학교 책상 아래 붙은 껌딱지를 긁어내며 번 돈(152달러 44센트)으로 처리했다.아제라드의 책에선 엔디노가 다섯 곡에 대한 비용만 청구했다고 썼다. 88년 가을 러시, 컬트, 러브 앤 로켓츠Love and Rockets, 큐어 등과 함께 올림피아 에버그린 기숙사에서 들려오게 될 이 데모는 “약간 이상한 포스트 펑크 각도를 한 70년대 리프 록”으로서 엔디노를 너바나의 역사에 초대했다.


너바나의 첫 데모에서 <Beeswax>와 <Mexican Seafood>는 나중 컴필레이션 앨범들에 실린다.


데모를 녹음한 날 저녁, 크로버는 커뮤니티 월드 시어터에서 공연을 준비했다. 밴드 이름은 그렉 호칸슨 모친의 남자친구 별명이던 '테드 에드 프레드'를 제안한다. 완성된 데모 테이프를 들고 차에 앉아 활짝 웃고 있던 커트를 기억하는 트레이시에 따르면 커트는 데모에 진심 만족한 나머지 공연장으로 가는 차에서만 두 번을 연달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테이프에 수록된 곡 순서는 공연 세트리스트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찰스 R. 크로스는 커트의 전기에 이렇게 썼다. “커트에게 그날은 ‘승리의 날’이었고, ‘진짜’ 뮤지션이 된 첫 번째 날이었다.” 물론 이때까지 커트를 멜빈스의 로드 매니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커트는 더 나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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