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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애틀 공연

by 김성대
초기 너바나 곡들은 활기차긴 했지만 위대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이 밴드는 주류의 경정맥을 따라 부치 빅의 그런지 풍 프로덕션을 받아들이며 비로소 크게 도약했다.

사이먼 레이놀즈

잭 엔디노는 완성한 너바나 데모를 팬진 『백래시Backlash』를 운영하던 돈 앤더슨Dawn Anderson, 앤더슨은 엔디노의 여자 친구이기도 했다과 잡지 『더 로켓』, 87년 가을에 설립한 미국 북서부 인디 레이블 서브 팝의 공동 대표 조나단 폰맨, 그리고 워싱턴 주립대 라디오 방송국KCMU에서 자원봉사 DJ로 일하던 셜리 칼슨Shirley Carlson에게 각각 보냈다. 이 중 조나단의 경우, “아주 박력 있는 보컬리스트가 있다”는 엔디노의 말에 호기심이 일어 스튜디오로 가 ‘크리스와 데일과 나’라고 수줍게 적힌 너바나 최초 데모 테이프를 직접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도 엔디노와 마찬가지였다. 돌아가는 길에 차에서 들은 <If You Must>가 흐른 지 71초 만에 턱이 핸들에 걸릴 정도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것이다. “커트의 목소리에 완전히 반했어요. 어느 한 곡을 듣고 감탄한 게 아니라, 밴드 자체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노래는 그런 전체 느낌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죠. 그 테이프를 듣고 ‘세상에!’라고 외쳤던 기억이 나네요.”

너바나 데모 테이프를 좋게 들은 건 돈 앤더슨과 셜리 칼슨도 마찬가지였다. 앤더슨은 곧장 『백래시』에 호의적인 기사를 썼는데, 이 글은 너바나를 다룬 최초 기사로 남는다. 셜리 역시 KCMU로 <Floyd the Barber>를 내보내면서 커트의 밴드에 힘을 보탰으니, 이 역시 ‘최초로 방송을 탄 너바나 곡’으로 역사에 남았다.


조나단은 테이프 카트리지 상자 청소나 테이프 복제 같은 허드렛일을 하던 배경음악BGM 회사 뮤작Muzak Corporation에 너바나 데모를 들고 갔다. 그곳엔 마크 암그린 리버, 머드허니과 러브 배터리Love Battery의 론 나인Ron Nine, 태드의 태드 도일Tad Doyle, 스왈로우Swallow의 크리스 퓨Chris Pugh, 워커바우츠The Walkabouts의 그랜트 에크맨Grant Eckman, 그리고 조나단의 사업 파트너인 브루스 파빗이 일하고 있었다. 음악가와 음악 사업가들이 있던 덕에 뮤작은 자연스레 로큰롤에 대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토론하는 장소가 됐다. 작가 제이콥 맥머레이Jacob McMurray는 그래서 뮤작이 “아이디어와 인맥을 교환하고 성장하는 시애틀 신을 위한 시험대 또는 용광로 역할을 했다”고 썼다. 브루스 파빗의 기억이다.

하루는 마크가 자신의 새 밴드인 머드허니의 데모 테이프를 들고 뮤작에 왔다. <Touch Me I’m Sick>을 들려주는데 정말 좋은 곡이라고 생각했다. 태드는 데모를 작업 중이라며 <Daisy>라는 곡을 가져왔는데, 이 곡은 나중에 머드허니의 곡과 함께 서브 팝 최초의 45회전 싱글이 되었다. 뮤작은 서브 팝이 출범하기 전 사실상 사무실 역할을 했다.


머드허니의 <Touch Me I'm Sick>은 태드의 <Daisy>와 함께 서브 팝 최초 싱글이 된다.


하지만 초기 와이퍼스나 코스믹 사이코스Cosmic Psychos, 스투지스 같은 직설적인 록을 좋아하던 뮤작의 ‘주크박스 심사위원’들은 처음엔 너바나 음악에 고개를 저었다. 록 냄새가 너무 많이 나고 헤비메탈 성향이 진한 반면, 언더그라운드 맛은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마크 암은 너바나 데모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드러머가 형편없어서 별로였다. 곡들은 불필요하게 복잡했고, 스킨 야드 같으면서 그들보단 못했다.” 파빗에 따르면 뮤작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너바나를 경계했다. 제아무리 훌륭한 데모를 가지고 왔어도 너바나는 타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저들의 평가는 박했으리란 얘기다. 뮤작 집단은 자신들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 최고 스타가 되길 바랐다.하지만 그들조차 커트의 훌륭한 목소리만큼은 인정했다. 커트도 이를 느꼈는지 처음 올림피아에서 살게 됐을 때 그는 트레이시에게 자신이 파벌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애틀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불평했다고 한다. 이 불평은 나중 <School>이라는 곡에 반영된다.


하긴, 커트가 저들에게 애써 인정받으려 한 적은 없다. 그는 데모 테이프가 나오자마자 사본을 떠 직접 쓴 긴 편지를 동봉해 자신이 계약 맺고 싶은 레이블들에 보냈다. 그 안엔 블랙 플래그의 그렉 진Greg Ginn이 설립한 캘리포니아의 SST와 펑크 록 밴드 D.O.A.를 보유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얼터너티브 텐타클스Alternative Tentacles, 그리고 나중 《In Utero》에서 만나게 될 스티브 알비니가 이끈 빅 블랙과 스크래치 애시드, 버트홀 서퍼스가 소속된 시카고의 터치 앤 고Touch and Go가 포함됐다. 의외로 커트의 의중에 서브 팝은 없었다. 커트가 자신들 데모를 마음에 들어 한 조나단의 전화를 받은 이유는 그의 레이블에서 사운드가든이 앨범을 냈기 때문이다. 제리 캔트렐앨리스 인 체인스이 시애틀 록 부흥의 시발점이란 측면에서 신scene의 뿌리grandaddy로 여긴 사운드가든은 메이저 레이블1989년 A&M과 계약했다에서 앨범을 낸 최초 서브 팝 출신 밴드가 될 터였다.


하지만 조나단은 이미 서브 팝 소속 밴드들 사이에서 “농간을 잘 부리는 성격”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 그가 시애틀 브로드웨이에 있는 카페 로마Cafe Roma에서 너바나와 한 미팅은 “재앙” 수준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트레이시에 따르면 이날 커트 일행은 긴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계속 훑어보는 조나단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막연한 의심과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마치 경찰이 그를 쫓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조나단에게 커트는 매우 소심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보였는데, 곁의 크리스는 또 정반대였다. 그는 시애틀로 올라오는 길에 올드 잉글리쉬Olde English 몇 잔을 마신 상태로,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만취 상태였다. 심지어 미팅 중에도 테이블 아래 둔 40년 산 위스키를 홀짝이던 크리스는 대화 내내 조나단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트림을 하거나 가끔씩 다른 손님들에게 “뭘 봐?!”라며 주정 부렸다. 조나단은 그런 크리스를 최대한 무시한 채, 어떻게든 가까운 시기에 너바나 싱글을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을 커트 측에 전했다. <Love Buzz> 정도를 싱글로 내보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조나단의 제안이 자신이 원한 수준에 한참 밑도는 것이었음에도, 정식 싱글 발매는 커트에겐 꿈의 실현이었으므로 일단 동의했다.


브루스 파빗은 88년 너바나의 잠재력을 쇼킹 블루 커버 곡 <Love Buzz>에서 보았다.


인더스트리얼 댄스 음악을 주로 틀던 시애틀 클럽 보그The Vogue에선 한 달에 한 번 라이브 음악도 선보였다. 서브 팝 선데이Sub Pop Sunday도 그중 하나였다. 서브 팝은 개별 밴드를 홍보하는 대신 기존 성공으로 얻은 팀 명성을 활용해 팬과 아티스트 간 ‘관계’를 판매했다. 즉 서브 팝 앨범을 구입한다는 건 팬이 밴드와 레이블까지 동시에 구입하는 것을 뜻했다. 때는 88년 초. 이때 시애틀 음악계는 어수선했다. 멜빈스, 그린 리버, 피스트Feast 같은 주요 밴드들이 활동을 중단했거나 해체한 한편, 태드와 머드허니와 마더 러브 본은 기지개를 켰다. 그해 4월 24일 너바나가 보그 무대에 선다. 찰스 R. 크로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날 밴드는 “치과 약속을 잡아 놓은 노인”처럼 공연 시작 네 시간 전 현장에 도착해 차로 인근을 빙빙 돌았다고 한다. 게다가 음향 체크 전 커트는 주차장에서 토했다고 하는데, 데이브 포스터는 술 때문이 아니라 긴장해서 그랬다고 했다.


긴장은 구겨진 결과를 낳았다. 전원이 제대로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Love Buzz>로 연주를 시작한 너바나의 시애틀 첫 무대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블루 치어와 비슷하게 들린다던 밴드에 관한 소문은 스무 명 안팎 관객들 앞에서 거짓으로 밝혀질 듯 보였다. 이날 너바나의 연주는 엉성했고, PAPublic Address 시스템도 계속 말썽을 일으켰다. “조나단, 정말 쟤들과 계약하고 싶어?” 듣는 내내 멜빈스와 너무 비슷하다고 느끼던 찰스 피터슨이 서브 팝 대표에게 물었다.커트의 친구 딜런 칼슨은 그날 너바나를 칩 트릭과 비교했다. 현장에 있던 마크 암도 “그때 라이브를 보고 ‘너바나는 위대한 밴드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는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잘라 말했다. 찰스 피터슨도 그날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이 밴드를 보거나 듣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찰스 R. 크로스의 책을 보면 시애틀 록 업계 유력자들 역시 “너바나가 서툴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데이브 포스터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완전히 망친 건 아니었지만, 굉장히 주눅 들어 있던 건 맞아요. 음반사와의 협상을 따내기 위한 공연이란 걸 알고 있었거든요.” 사진가 리치 한센이 공연 뒤 너바나 모습을 찍을 때 술을 마시며 “우린 망했다”고 한 커트는 데일 크로버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데모 테이프는 더빙돼서 해적판으로 나돌며 시애틀 신 주요 인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어. 조나단은 보그 클럽에서 열린 ‘서브 팝 선데이’라는 이벤트에 우릴 세웠는데 뭐 특별할 건 없었어. 마치 시애틀의 유명 밴드들에서 구경 온 ‘대표자’들에게 득점표로 심사당하는 기분이었지.


이후 5월 공연은 아무도 오지 않아 취소됐고, 7월 공연은 단 12명만 왔다고 하니 커트 말처럼 그때 너바나는 정말 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6월 5일, 시애틀 파이오니어 스퀘어Pioneer Square에 있는 센트럴 태번Central Tavern에서 밤 8시에 열린 너바나 공연을 본 서브 팝 설립자 둘이 너바나에게서 잠재력을 본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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